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그래, 졸업여행인데. 이왕 가는 졸업여행 아무 데나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마음먹은 잠뜰은, 모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놀이공원 어때? 아니, 들어봐."
잠뜰이 내세운 주장은 이랬다.
"놀이공원은 사진 찍을 곳이 많아. 솔직히, 산이나 바다 같은 곳은 사진 찍어도 배경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 이왕 놀러 가는 거, 사진 좀 예쁜 곳에서, 많이 찍으면 좋잖아. 여행에서 남는 건 뭐다? 사진이다~,이거지. 안 그래? 그리고 놀이공원 가면 놀 것도 많잖아. 바이킹에, 롤러코스터에…."
사진, 그래… 여행의 목적은 사진이긴 하지.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는 와중, 덕개가 궁금하다는 듯 손을 들고 물었다.
"우리 2박 3일이잖아. 그럼 숙소는?"
"숙소…, 숙소라. 놀이공원 근처에 숙소 많잖아. 거기서 제일 넓은 곳으로 알아보면 되지."
옆에서 듣고 있던 수현이 말했다. 그러자 덕개는 "아… 그러네? 그럼 가자, 놀이공원. 좋네."라며 곧바로 수긍했다. 다른 의견도 딱히 나오진 않았기에, 그들의 졸업여행지는 놀이공원으로 정해졌다.
…
크리스마스 당일이라 그런지, 놀이공원 안은 사람들의 인파로 북적북적했다.
"사람 많긴 진짜 많다. 그래도 어때, 잘 온 거 같지?"
잠뜰이 돌아보며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저 뒤에서 공룡이 "춥잖아, 계속 기다려야 하고."라며 볼멘소리를 구시렁구시렁 늘어놓았다. 지금 23분째 핫팩으로 언 손을 녹이며 제 순서를 기다리고 있지만… 아무래도 인기 놀이기구인 바이킹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지 않겠는가.
수현은 그새를 못 참고 옆에 있던 덕개를 꼬드겨 츄러스와 호떡을 사러 갔고, 라더는 이 추운 날에 잠은 오는지 롱패딩 껴입고 서서 꾸벅꾸벅 졸고 있기 바빴다. 때마침 수현과 덕개가 돌아오자 공룡의 볼멘소리도, 라더의 졸음도 흐지부지 묻혔고, 남은 기다림의 시간도 간식이 있어서인지 빠르게 지나갔다.
바로 앞까지 오자 간식도 다 먹은 상태였고, 운 좋게 바이킹 뒷자리가 비어있던 터라 그들 일행은 속으로 '나이스'를 외치며 빠르게 탑승했다. 크게 숨을 들이쉬자, 차갑지만 기분 좋은 바람이 잠뜰의 기분을 들췄다. 바이킹이 점차 위로 올라갈수록 사람들의 환호 소리도 커졌고, 잠뜰과 일행들도 인파에 묻혀 신나는 기분을 마음껏 발산했다.
그렇게 바이킹 하고도 여러 놀이기구들을 탔을 때였다. 공룡이 놀이공원 지도와 어딘가를 번갈아 보더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야, 내 지도에만 저기 귀신의 집 안 나와 있냐?"
"뭔 소리야, 귀신의 집이 왜… 어라?"
라더가 한심하다는 듯 공룡의 지도와 자신의 지도를 비교해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귀신의 집을 바라봤다. 과연, 지도에는 표시되어있지 않았지만 자신의 앞에 있는 건 틀림없는 귀신의 집이었다. 그들이 멍하니 귀신의 집을 바라보고 있자, 보다못한 청소부 한 분이 와 "저번에 새로 지었으니 없죠." 하고 귀띔해주었다.
어쩐지 다른 건물들보다 페인트 냄새가 심하더라니. 뒤에서는 덕개가 수긍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건물을 지나치려다, 갑자기 공룡이 멈춰서더니 제안 하나를 했다.
"야 얘들아, 우리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 한 명이 저기 혼자 들어갔다가 나오기 할래? 재밌을 것 같지 않음?"
"갑자기 그게 무슨-"
어이없단 듯 잠뜰이 대꾸하려 했지만, 다들 괜찮다는 분위기였고, 그렇게 즉석에서 성사된 내기의 주인공은…
"가~ 위바위… 보! 이야아아아!!!"
극적으로 잠뜰이 되었다. 기뻐하는 수현을 째려보던 잠뜰은,
"야 진짜 어이없네… 다시 해, 다시!"
다시 하자는 제안을 하지만 가볍게 씹힌 채, 잠뜰은 억지로 등 떠밀려 들어가게 됐다.
사실 무서웠던 건 아니다. 지금 타러 가려던 놀이기구가 롤러코스터라 그렇지. 무서운 것도 곧잘 보는 터라 금방금방 끝나겠거니… 했는데. 문제는 이 귀신의 집 건물이 보기보다 굉장히 길었다는 점이다. 잠뜰은 이를 악물고 달리다시피 걸었는데, 그 와중에도 귀신 역할을 맡은 직원들이 이따금 튀어나와 겁을 주고는 사라졌다.
'힘드시겠네….'
그럴 때마다 잠뜰은 그냥 지나치긴 했지만. 그렇게 귀신의 집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였나, 어떤 실루엣이 문을 열고 어딘가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 곳은…
"뭐야."
문이 없는, 벽이었다. 헛것인가, 아니면 이것도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출구로 나가는 잠뜰은,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왜… 아무도, 없어?"
…
이상했다. 곧 퍼레이드 할 시간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거리에 사람이 단 한 명도, 심지어 아까 청소하던 그 청소부도 없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근데 이렇게 조용할 수 있나…? 잠뜰은 주변을 둘러보다 바닥에 쪽지가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마치 개미처럼… 일렬로 떨어져 있는. 쪽지 하나를 주워 펼쳐보자, "따라와" 라는 말만 적혀있을 뿐, 그 밖의 이상한 점은 없었다.
"뭐지? 애들 글씨첸가? 그렇다기엔 너무 잘 썼는데."
일단 따라오라는 말이 있었으니까… 따라가서 나쁠 건 없겠지. 잠뜰은 그렇게 쪽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따라가며 지도를 확인해 보니, 어딘지는 몰라도 놀이공원의 중심 지역으로 가는 건 확실해 보였다.
'사람이 없는 건 착각이 아니었나보네.'
잠뜰은 하늘이 진한 파랑을 띄어갈 때쯤, 회전목마 앞에 도착했다. 화려하게 감싸진 전구는 따뜻한 빛으로 반짝거렸다.
"뭘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옛날 생각 나네."
그래, 예전 이맘때에도 애들이랑 왔었는데. 물론 아직 중학교도 채 들어가지 않았을 때 얘기지만. 그땐 덕개가 바이킹도 맨 앞자리 아니면 안 탔었지. 수현이는… 솜사탕을 빨리 먹을 거라며 사이다에 넣었다가 울었지, 아마?
잠뜰이 그렇게 돌아가는 회전목마 앞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옛날 생각에 잠겨있을 때, 저 멀리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 사람은… 각별이었다.
"야, 잠뜰, 너, 어디, 있었냐? 찾고있, 었거든?"
숨이 찬 지 연신 헉헉대다 어딘가로 잠뜰을 끌고 가는 각별은 왜인지 되게 신나보이는 얼굴이었다. 또 뭘 꾸몄길래 저렇게 좋아하는지.
…
"짠! 생일 미리 축하해, 잠뜰!!"
도착한 곳은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기념품 가게 앞이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수현이 든 케이크 옆으로 옹기종기 모여 곧 올 잠뜰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었다.
"허, 진짜… 내가 감동 받을 줄 알았냐? 아니거든?"
"응~ 말은 그렇게 해도 눈물 고였음~."
잠뜰은 나오려는 눈물을 손부채질까지 해가며 겨우 집어넣었지만, 감동 받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속 깊은 놈들, 평소에도 이러면 좀 좋냐고. 그렇게 근처 카페 테이블에 앉아 케이크를 나눠먹으며 얘기를 하던 중에, 잠뜰은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라더의 대답은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너희 아까 어디 갔었냐? 귀신의 집 들어갔다가 나오니까 너희도 없고, 아무도 없었음."
"뭔 귀신의 집을 가? 화장실 간다며, 우리는 롤러코스터 먼저 기다린다고 하고 줄 서러 갔는데?"
"…어?"
"맞아, 너 화장실 간다고 하고 빠졌잖아."
맞장구 치는 수현의 말에 잠뜰의 표정은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
"그리고, 여기 귀신의 집은 롤러코스터 반대편 끝쪽에 있다가 개노잼이라 사라진 걸로 유명해. 나 예전에 왔을 때 들어갔다가 하나도 안 무서워서 시간만 버리고 나왔음."
한입 크게 케이크를 떠 먹는 덕개는 다시 생각해도 재미없었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럼, 내가 본 건 뭐였는데?"
"에이, 너 화장실 가서 존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시시콜콜한 농담을 나누다 저 위쪽에 있는 시계탑이 9시를 알리는 종을 울렸다. 잠뜰이 그 곳을 바라보느라 한 눈 팔자,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일행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러게, 네가 본 건 뭐였을까.
fin.
Written by. 사비
Drawn by. 혈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