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엔딩 하이스쿨 뮤지컬
그리고 지금 여유로운 표정으로 부실을 나가는 저 인간이 하는 말이 진짜라면...
“우리 다음 달에 무대 선다.”
저희는, 아니 저는 지금 심각하게 X된것 같습니다
이름, 박덕개. 열일곱이라는 꽃다운 나이로 나름대로 착실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 하나. 특이사항이 있다면 매일 종 칠 때 교실에 허겁지겁 들어오지만 지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점과 드립만 치면 주변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어 들성고 엘사라 불린다는 점. 그것 외에는 정말 별다를 특이사항이 없는 교복 입은 학생이었다.
나는 특별해지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입만 열면 노잼이라고 장난스럽게(가끔은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했다) 딸려오는 꼬리표 탓도 조금은 있었지만 빨간 공 열 개 있을 때 굳이 혼자 파란 공이 되어 튀어야 할 필요성을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기에 나는 평범하디 평범한 학생이 되기를 원했다. 정확히는 원했었다. '들성고 엘사' 별명이 빌어먹을 관종 정공룡의 입을 타고 타고 전교로 퍼지게 되어 나도 모르는 새에 전교생 모두가 내 존재를 알게 되는 사단이 일어났다. 오죽하면 복도에서 마주친 교장 선생님까지도 내 명찰을 한번 보고는 아 그 학생... 이라는 짧은 말씀을 하신 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가던 길을 계속 가셨을까. 그렇게 내 이미지는 일학년 정모 씨 하나 때문에 엘사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게 다 정공룡 때문이야. 그 엘사라는 거지 같은 별명이 지금 돌고 있는 이 찌라시에 대한 원인이었다. 학교 공식 엘사 일학년 삼반 박덕개가 뜬금없이 다 망해가는 들성고 뮤지컬부에 입부 신청서를 넣은 이유가 다름 아닌 노잼 이미지를 깨트리기 위해서라는 소문.
Q. 그 소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죠?
A. 뭔 헛소리에요. 저도 거기 들어간 거 억울해 죽겠구만.
누가 이딴 소문을 퍼트렸대. 매점에서 사 온 미니벨을 뜯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차라리 저 소문이 진짜였다면 덜 억울하지. 아 미친! 물 묻어 미끌거리는 손 탓에 조그마한 초콜릿들이 봉투 속을 탈출하여 운동장 바닥으로 떨어졌다. 운수가 없으려니 더럽게도 없네. 이게 다 오늘 아침에 확인한 구린 별자리 운세 탓이라 구시렁대며 얼마 남지 않은 초콜릿을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아까운 내 500원. 쪽지 모양으로 대충 접은 봉투를 쓰레기통에 골인시키고 털레털레 교실로 들어가던 내가 발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잠뜰 선배였다.
“부장이 왜 여기에...?”
“어 잘됐네. 너 나 좀 따라와라.”
어, 야 아니 잠깐! 평소 같으면 꼬치꼬치 따질 야 라는 말도 무시한 채 희번득거리는 눈으로 내 셔츠 소매를 질질 끌고 들어가는 저 미친 사람이 소문의 다 망해가는 들성고 뮤지컬부의 부장이자 나를 이 거지 같은 동아리로 끌고 온 장본인인 2학년 박잠뜰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할 짓 없어서 혼자 빠삐코를 씹으며 운동장을 활보하던 내가 인생 푸념 한번 하며 세게 찬 콜라캔에 맞은 잠뜰이라는 인간이 빡친 얼굴로 다가온 것이 이 부 활동의 시발점이었다. 난 망했다, 망했어. 하필 걸려도 저 2학년 박잠뜰이라니. 잠뜰의 새하얀 가디건에 살짝, 아니 많이 튄 먹다 남은 콜라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왜 하필 먹다 남은 콜라캔이 운동장 바닥에 차기 좋게 버려져 있어서. 왜 하필 그 콜라캔은 오늘따라 발에 착 감기면서 세게 날아가서. 그리고 왜 하필 그 옆을 저 선배가 지나고 있어서. 눈물을 쥐어짜내며 믿지도 않는 온갖 신들에게 기도했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그리고 이름 모를 여러 신이시여 제발 저를 불쌍하게 여겨 도와주시고,
“너 노래 잘하게 생겼다.”
네? 이게 무슨 달걀 거꾸로 세우는 소리인가요. 방금까지만 해도 잔뜩 화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던 게 꼭 얼마 전에 본 공포영화의 한 장면스러웠는데 노래를 잘하게 생겼다니, 나로서는 어이가 하늘로 훨훨 날아갈 말이었다.
"이거 있잖아. 세탁비랑 사과 대신에 노래로 받으면 안될까?"
물론 안될 건 없죠. 안될 건 없는데... 대체 제 노래에 왜 이렇게 집착하시는 건가요. 아무리 내가 이 학교 마스코트급의 유명인사라 해도 운동장 한복판에서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건 좀... 이 선배에게는 나를 쪽팔리게 해서 기절시키려는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아, 아니 그게 말이죠 선배."
"싫으면 됐어. 내가 강요할 수도 없는 건데 뭘."
근데 이 옷 얼마더라? 한 오십... 바로 부르면 될까요? 여기서 거절하면 내 낡은 가죽 지갑을 영영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노래 한 번에 내 통장 잔고가 왔다 갔다 하는데 일 년 치 이불킥 하는게 대수야? 며칠 전 황수현이랑 널빤지와 널판지 중 어느 단어가 표준 표기법인지 문상 걸고 내기했다 져서(빵이 포르투갈어라는 것을 알았을 때만큼 충격적이었다) 얇아진 내 지갑을 사수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 자리에서 꼭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북한산 정기 어린... 배움의 전당... 급하게 부르다 보니 생각나는 노래도 없어서 두 눈 꾹 감고 학교 교가를 불렀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나는 왜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지. 가사를 하나하나 뱉어갈수록 뜨거워진 귀와 식은땀이 마구 나는 게 느껴졌고 노래가 끝난 직후에는 그저 빨리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 들어찼다. 그렇게 겨우겨우 교가 1절을 끝마쳤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 정수리로 느껴지는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선배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왜 대답을 안 하지? 설마 2절까지 불러야 하나? 갖가지 생각을 하며 도망칠 계획을 세우다 포기했다. 쪽팔림을 끌어안고 계속해서 여기에 남아있을 만큼의 깡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저 선배 앞에서 도망칠만한 깡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할 수 없이 나는 손가락을 조물딱거리며 그 자리에 얼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 우리 부 들어올래?”
그건 또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요. 저런 헛소리에는 당연히 거절의 의사를 밝혀야 했지만 흰 가디건에 튄 갈색 자국들이 내 눈에 자꾸만 밟혔다. 왜 그래 박덕개. 너 그렇게 양심 있는 인간 아니었잖아. 노래 부르면 세탁비고 뭐고 깔끔하게 청산 되는 거였잖아. 오랜 생각 끝에 애써 가디건에서 시선을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다른 부서에 들어가려는 계획이 있,”
“기획자 역할 겸하면서 성실하게 일해주면 달마다 매점 빵 세 개.”
그리고 우리 동아리 한 달에 한 번씩 치킨 먹는다. 충실한 개, 아니 성실한 부원이 되겠습니다. 고작 매점 빵 세 개와 치킨이 망해가는 뮤지컬 부에 배우 및 기획자로 들어오게 된 이유였다. 절대, 네버, 에버 관심 받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빵 받고 피크닉까지 덧붙일 걸 그랬어.”
“뭐라고?”
“아니에요 선배. 계속하세요.”
하여간 귀는 엄청 밝아요. 빵 하나를 우물우물 씹으며 부장이 말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정확히는 먹는 일에 집중하여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꼴이었지만.
“우리 다음 달 축제에서 무대 선다.”
커흑, 켁, 콜록. 뭐요? 무대? 청천벽력 같은 선배의 한 마디에 기겁하며 먹던 매점 빵을 내려놓았다. 저 부장이라는 생각 없는 인간이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커다란 일을 끌고 온 것인지, 애초에 내가 들은 저 말이 사실인 것인지, 온갖 물음표들이 눈앞에 그려지며 세상이 빙빙 돌았다.
“오늘 중대 공지사항은 여기서 끝이니까 질문 있으면 단톡방에 남기고. 남은 점심시간 즐겁게 보내라.”
부실을 빠져나가는 부원들과 답 없는 부장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한 달? 한 달이라고? 대본은? 의상은? 무대 준비는? 그거 다 기획자인 내 몫 아니야?
“아아아악!”
주저 앉아 머리를 싸매고 절규한 날부터였다. 다 망해가는 들성고 뮤지컬부의 부실에 비명을 지르는 귀신이 산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
“인생 거지 같다.”
“난 재밌을 것 같은데?”
황수현 이 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막말하네. 니가 무대 준비하냐? 내가 하지. 길거리에 놓인 돌을 툭툭 차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한 달 후에 무대라... 대본을 쓰는 것도 무리, 그렇다고 두시간짜리 뮤지컬 대본을 한 달 만에 완벽하게 외우는 것도 무리, 애초에 짧은 공연이니 긴 연기를 펼치는 것도 무리인 상황.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넌 생각해 놓은 거 없어?”
“한낱 부원인 제가 뭘 생각했겠습니까. 다 우리의 전지전능하신 부장께서 생각이 있겠거니 하고 이렇게 마음 편히 있는 거죠.”
부장이 생각해놓기는 개뿔, 생각은 없고 잠만 잘 자더라. 안 그래도 정말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재확인 차 쉬는 시간에 부장의 교실에 들른 적이 있었다. 잠뜰이? 걔 지금 자는데. 아 선배 정말 급한 일이라 그런데 잠뜰 선배 좀 깨워 주시면 안될까요? 또 다른 뮤지컬부 부원인 또니 선배가 내 간절한 부탁에 잠뜰 선배를 불러내 주었다. 잠뜰이 잠을 깨운 나에게 발차기를 날려도 자기는 아무 책임 없다는 덧붙임과 함께.
“뭐, 왜.”
“선배, 솔직히 말해줘요. 계획 있는 거죠? 그렇죠?”
“무슨 계획?”
“다음 달에 무대 선다면서요. 계획 다 세우고 그런 결정 한 거죠? 에이, 설마 잠뜰 선배라도 그렇게 무책임하지는 않을 거라 믿,”
“계획 없는데.”
“네?”
“한 달이나 남았는데 무슨 계획을 벌써 짜.”
그렇게 조급하면 우리 후배님께서 그 계획 한번 기깔나게 짜보시던가. 갑자기 휘몰아친 폭풍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부장이 태평하게 교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너도 귀찮지? 그냥 편하게 마음 비우고 있어. 그럼 난 다시 자러 간다. 아니 선배, 잠뜰 선배! 눈앞에서 세게 닫히는 교문을 허탈하게 바라보며 교실로 돌아갔던 것이 불과 몇 시간 전. 너도 포기하는 게 편할 거란 뉘앙스의 말에 쓸데없는 오기가 생겨 하교하는 선배에게 두고 보라는 투로 모든 무대 준비를 기깔 나게 끝내오겠다 의기양양하게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박덕개 미쳤어? 집으로 걸어가며 나 자신에게 미쳤냐는 말을 중얼거리는 나를 황수현은 모르는 사람 취급한 지 오래였다. 지금이라도 톡으로 실언했다고 해볼지 메세지를 백번 썼다 지우며 계속해서 고민했지만 보내지는 않았다. 부장이 그럼 그렇지라며 나를 비웃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결국 나는 이 행동을 후회하면서도 무대 준비를 착실히 해야 했다. 자나 깨나 입조심이라는 말을 매일같이 떠올리며.
-그래서 이번 무대에 관한 모든 것들은 제가 담당하게 되었어요. 기간이 빠듯한 만큼 다 같이 부를 수 있는 넘버나 뮤지컬 영화 OST 한 3개 정도 가져와서 무대 구성하면 될 것 같아요. 추천하고 싶은 노래 있으면 공지에 댓글로 남겨주세요.
어떻게 일곱 명중에 단 한 명도 공지를 안 읽을 수가 있지? 공지를 보낸 지 거의 하루가 지났는데도 하나도 줄어들지 않는 읽음 표시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 정도면 나 말고 나머지 부원들끼리만 있는 톡방이 하나 있는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톡을 보냈다.
-덕개님이 랜덤 5명에게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행운의 주인공은?
집집마다 찾아가서 뒤통수 한 대씩 때려버릴까. 어제의 공지는 관심도 주지 않더니 어떻게 선물 메시지 문구는 일곱 명 전체가 한 번에 찾아와서 읽을 수 있지? 생각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 부원들의 멱살을 잡고 공연을 성공시키면 보너스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나마 위안을 삼고 폭주한 채팅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각별] 선물로 장난치는 거 아니다
[수현] ㅇㅈㅇㅈ 각별 선배 오랜만의 맞말
[공룡] 그렇게 관심이 받고 싶었음?
[티티] 옜다 관심
[또니] 관심관심
이것들을 진짜.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며 공연이고 나발이고 확 던지고 나가버릴지 일 분 동안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콩가루 동아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여기서 정신줄을 붙잡지 않고 있으면 결국 이 동아리는 망하다 못해 아예 들성고의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이 난리 통 속에서도 열심히 정신줄을 붙잡아야만 했다.
-노래 추천 없어요?
[라더] 잠뜰 선배랑 각별 선배가 정하는 거 아니었어?
[각별] 그런 얘기 처음 듣는데
[잠뜰] 그거 덕개한테 맡겼는데
[수현] 대박
[라더] ㅎㅇㅌ
제가 죽으면 사인은 고구마 백 개 먹고 목 막혀서 죽은 겁니다. 이 고구마 부원들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체 내가 부장인지 부원인지.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싶은 것을 겨우겨우 참고 떨리는 손으로 한 글자씩 다시 타이핑을 했다.
-작년에 선배들은 라라랜드 뮤지컬 했다고 들었는데 그럼 ‘Another Day Of Sun’ 하는 게 편하지 않을까요? 한번 해봤으니까 파트 분배랑 동선만 다시 짜면 될 것 같고 저희만 좀 고생하면 될 것 같은데
[티티] 오 좋네
[또니] ㅇㅋㅇㅋ 좋다
[수현] 저번에 연습했던 ‘This Is Me’는?
-아 그게 있었지 그럼 일단 그거 두 개로 연습해요 마지막 하나는 추천으로 받거나 좋은 노래 찾으면 제가 여기 올릴게요 내일 연습 11시 반에 부실에서 있는 거 알죠?
한시름 놨네. 메시지를 치는 내내 던지고 싶었던 휴대폰을 침대에 던지고 쓰러지듯이 누웠다. 생각보다는 잘 진행됐던 회의였지만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한 나머지 눈이 자꾸만 감겼다. 그러니까 내일부터는 파트 분배랑 동선 새로 짜야 하고 그다음부터 노래랑 춤 연습 시작이려나. 의상이랑 소품은 또 어떻게 준비하지. 온갖 생각이 엉키고 엉켜 아예 풀지 못할 매듭이 되어버리자 나는 급기야 칼로 그 매듭을 잘라버렸다. 모르겠다. 한낱 부원인 내가 혼자 끙끙 앓는다고 안 풀리던 일이 풀리겠어? 내일 주말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그 생각은 내 경기도 오산이었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챘어야 했다.
“그래서 각별 선배는? 수현이는? 부장은? 다 어디로 사라졌어요...?”
“각별이랑 수현이는 학원에 붙잡혔대. 끝나고 바로 온다는데?”
“부장은요?”
“걘 나도 몰라. 근데 잠뜰이가 이런 데 늦을 애는 아닌데? 진짜 무슨 일 생겼나?”
무슨 일이라는 게 엎어져 자는거겠죠. 아마 전화 안 받을 거 같은데... 연락을 해보는 티티 선배의 뒷모습을 애잔하게 바라본 후 휴대폰 액정을 보았다. 약속 시각에서 10분이나 지났는데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도 없고 말이지.
“우리끼리라도 파트 나눌까요?”
부장도 부부장도 없이 중대사안 결정하는 이 콩가루 동아리가 잘도 굴러가겠다. 아이고 내 팔자야. 온갖 신을 원망하며 한 구석에서 놀고 있는 부원들을 불러다 열심히 파트를 나누었다. 치킨에 홀려버린 내가 잘못이지. 내가 올해만 지나가면 동아리 나가고 만다. 그렇게 나는 내년에 내가 꼭 해야 할 리스트의 1번에 굵은 글씨로 ‘동아리 나가기’를 추가했다.
“파트 이렇게 나누는데 불만 없죠?”
불만 있으면 안될 것 같은 표정인데? 에이 설마요 선배. 두시간의 회의 끝에 파트 분배가 여차저차 끝나게 되었다. 안 온 사람들한테는 나중에 따로 물어보지 뭐.
“그럼 파트에 관한 건 여기서 끝이고... 원래는 동선 정하는 것도 오늘 끝내려고 했는데 보시다시피 3명이나 빠져서요. 동선은 다음에 다 같이 모였을 때 한 번에 정하도록 해요. 그럼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까 개인 연습이나,”
“늦어서 미안, 오는 길에 일이 좀 생겨서. 과자 사 왔으니까 먹고들 해.”
약간 흐트러진 머리와 갈라진 목소리로 과자가 여러 개 담긴 검정 봉지를 들고 온 잠뜰 선배는 파트 분배가 끝났다는 말에 벌써 거기까지 했냐는 한마디를 하고는 꼬깔콘 몇 개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근데 무슨 일이 있었길래 두 시간이나 걸렸어요?”
“어? 어, 그게 말이지...”
음? 오늘따라 선배가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시원시원하게 대답했을 라더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질질 끄는 모습, 마치 변명거리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 못할 일을 했길래 이렇게 늦고도 대답을 제대로 못 하는 거람?
“뻔하지 뭐. 딱 봐도 코인노래방 들러서 두 세곡 정도 목 풀고 온다는 게 한 시간이 되고 두시간이 된 거잖아. 얘 처음 들어왔을 때 목 잠긴 거 들었지?”
“선배 설마 진짜로...”
“실망했어요 부장...”
“티티 자꾸 헛소문 퍼트릴래? 나 온 지 10분도 안됐는데 다시 집에 가버릴까 보다.”
에이 당연히 장난이지 부장. 방금의 질문을 넘기려는 듯 딴 소리를 하는 티티 선배와 그런 티티 선배의 말을 받아 능청스럽게 라더의 질문을 넘기는 잠뜰 선배. 분명히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 먹었으면 연습 할까?”
말만 부장이었던 건 아니었나 보네. 잠뜰 선배의 한 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부원들을 보며 감탄했다. 아니 근데 이 사람들, 내가 말할 때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부장 왔다고 이러기야? 물론 잠뜰 선배의 말에도 느릿하게 움직이는 부원들의 모습은 똑같았지만 왜인지 모를 배신감을 느낀 나는 과자 봉지를 버리는 척 하며 은근슬쩍 모두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다.
“박덕개 너 자꾸 농땡이 피울래?”
아 제가 제일 일 열심히 하는데 뭔 소리예요. 한다고요 해. 쓸데없이 눈치는 또 빨라요. 온갖 불만을 구시렁대며 곧 넘칠 듯한 쓰레기통을 발로 꾹꾹 밟았다. 이건 박잠뜰이다, 이건 부장이다라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담아.
"오늘 수고했고 다음 연습 때 다시 보자. 각별이랑 수현이는 늦게 온 만큼 더 연습해오는 거 잊지 말고."
그럼 해산! 잠뜰 선배의 그 말에 탈출하듯 부실을 빠르게 빠져나가는 부원들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단언컨대 이 사람들은 해산이라는 말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할 것이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나 또한 가방을 챙기고 집으로 가려 했다. 그러니까 가려고 했는데...
"제가 왜 여기에 있죠."
"잔말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
뭐 마실래? 그러니까 제가 선배랑 카페에 온 이유부터 설명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여기 쌍화차에 휘핑크림 올려서, 저 핫초코요.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일까. 잠뜰 선배랑 단 둘이 카페에 와서 음료 하나씩 쥐고 어색하게 앉아있는 모습이라니. 차라리 정공룡이 하루아침에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이 되는 게 세 배는 더 현실성 있어 보였다.
"그래서 전 왜 부르신 건지..."
"힘들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오늘 점심 뭐야? 라는 투로 힘드냐고 묻는 잠뜰의 얼굴에 반쯤 마신 핫초코를 던져버릴 뻔했다. 내가 어쩌다가 매점 빵 세 개랑 치킨에 넘어와서 이 지경이 된 건지.
“들어온 거 후회 돼?”
“당연하죠!”
내가 그 오십짜리 가디건에 콜라 자국만 안 만들었어도 매점 빵이랑 치킨이라는 제안에 혹해서 들어올 일은 없었을 텐데. 이게 다 내가 너무 착해서야. 암암 그렇고 말고. 이렇게 착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겠어. 핫초코를 마시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잠뜰 선배가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네가 이 동아리에 들어온 걸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지. 후회고 뭐고 말할 시간에 성실히 일하는 부원 복지나 더 잘 챙겨주세요! 빽 소리를 지른 후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혼나려나? 화났으려나? 얼떨결에 생각 없이 일을 저질러 버린 탓에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이대로 나가면 다음에 저 선배 얼굴 어떻게 보지? 진짜 뒷일 생각 안 하고 사는구나 박덕개.
“야.”
진짜 화난 거 아니야? 잠뜰 선배의 한마디에 카페의 문손잡이를 잡은 손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미쳐버리겠네. 잔뜩 긴장한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자존심을 굽힐 수는 없었기에 애써 쿨한 척 뒤를 돌아보았다. 왜, 왜요.
“이거나 가져가라.”
“이게 뭔데요?”
“보면 알아. 그리고 내가 보낸 영상 꼭 확인하고.”
나 먼저 간다. 문 앞에 나를 내버려 둔 채 잠뜰 선배는 빠른 발걸음으로 카페를 떠났다. 저 선배는 대체 뭐지. 잠뜰 선배가 내게 주고 간 서류 봉투를 읽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어?”
서류 봉투에는 오늘 우리가 분배한 파트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프린트 된 문서 한 장과 검은색 볼펜으로 짜여져있는 동선 표가 들어있었다. 가사 종이와 동선 종이 곳곳에는 잠뜰 선배 특유의 샤프한 글씨로 주의사항이나 강조해야 할 점이 적혀져 있었다. 시간도 없었을 텐데 언제 이런걸 준비했대?
“아까 인쇄실 다녀온다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농땡이 피우러 가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래도 자신이 부장이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는 인간인 것 같아 마음의 짐이 한시름 덜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영상 보낸 것도 보라고 했는데.
“헐.”
우리 부장이 달라졌어요...! 파트와 동선 정리한 종이만 깔끔하게 정리해서 준 것인 줄 알았는데 안무 영상도 보내주다니. 작년에 선배들이 찍었던 건가 보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이어폰을 꽂고 조용히 안무 영상을 재생했다. 옛날의 들성고 뮤지컬부가 인기 있던 이유가 있었네. 지금은 졸업했을 선배들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들과 안무 구성에 혀를 내둘렀다. 어, 잠뜰 선배다. 작년에는 1학년이어서 큰 배역은 맡지 못했는지 가장 왼쪽에서 열심히 자신이 맡은 안무를 하는 잠뜰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이 사람 괜히 부장인 게 아니구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춤을 추는 선배의 모습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활동을 할 때 사람은 가장 빛이 난다. 그것이 바로 일학년 박잠뜰이 이 영상 속 그 누구보다도 제일 빛나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30초밖에 나오지 않는 아주 짧은 엑스트라 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구간을 몇 번이고 계속해서 돌려보았다. 춤을 추며 환하게 웃는 부장의 모습을.
부장이 정리해 준 파트와 동선 덕에 이 두 곡은 연습만 좀 더 하면 완벽하게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것 같고, 세 곡 정도가 무대 채우기에 적당할 것 같은데 하나는 뭐로 해야 하려나. 그날 이후로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방과 후 시간이 날 때마다 거의 매일같이 부실에 모여 연습을 했고 덕분에 제법 무대에 오를만한 구색이 갖추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원래 문제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법. 아직 이 무대의 엔딩 무대를 장식할 노래를 정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찾지 못했다. 일주일 동안 많은 뮤지컬 넘버와 뮤지컬 영화들의 OST를 들어보았지만 이렇다 싶을 정도로 꽂히는 음악은 없었다. 부원들에게 의무적으로 하나씩 추천 받은 넘버들도 이프로 부족한 반응만이 나올 뿐이었다.
“삼 주 안에 다 끝낼 수 있을까?”
여러 문제들에 머리가 아파 도통 잠을 잘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후드 집업을 하나 걸친 채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었다. 아파트들 사이로 고개를 내민 달이 아주 밝았다. 무대를 10분도 채 안 되게 짧게 끝내야 하려나. 여러 생각을 하며 이어폰을 꽂고 다시 플레이리스트에 들어있는 노래들을 재생했다.
“잠뜰이 너무 미워하진 마. 걔 힘든 애 거든.”
“부장이요?”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는데 걔 집에서 이 활동 하는 거 극구 반대 했는데도 자기가 좋아서 하겠다고 말하고 부 활동 이어가는 거야. 저번 첫 연습 때 박잠뜰 늦지 않았어? 그것도 그 때문일걸. 잠뜰이 너에게 아무 계획도 말하지 않으려 한 것은 부원들에게 줄 짐을 덜고 싶었기 때문일 거야. 걔는 어려서부터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 하는 성격이었으니까. 2학년들이 왜 아무런 걱정도 안 하는 줄 알아?”
우리의 믿음직스러운 부장의 머릿속에는 모든 계획이 다 들어있거든. 잠뜰은, 우리 부장은 그런 사람이니까. 각별 선배와의 짧은 대화가 잠깐 떠올랐다. 이어서 잠뜰 선배가 나에게 주고 간 서류 봉투와 선배의 살짝 잠겼던 목소리가 그려졌다. 선배가 짐을 덜고싶었다라. 사실 진지한 박잠뜰이란게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물어볼 것이 있어 교실만 찾아가면 한결같이 자고 있는 선배의 이미지가 쌓이고 쌓여 단단히 자리 잡았으니까. 이런 이미지를 스스로 구축하면서 홀로 속에 많은 고민을 쌓아왔을 선배가 처음으로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리스트의 다섯 번째 노래의 중반 즈음을 듣고 있을 때였다.
[잠뜰] 야
선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게 이런 건가. 근데 선배가 이 시간에는 무슨 일로 나한테,
[잠뜰] 야야야ㅑㅑ야야
아 네네 답장 할게요. 한다고요. 새벽 세 시의 갑작스러운 메시지 테러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빠르게 답장을 타이핑했다.
-왜왜ㅐ왜왜ㅇ요
[잠뜰] 이거 한번 들어봐라
선배가 보낸 것은 다름 아닌 영상 링크 하나였다. 하이 스쿨 뮤지컬? 이런 노래도 있었나?
[잠뜰] 꼭 들어 다 듣고 나면 답장 주고
선배의 말에 나는 거의 다 끝나가는 다섯 번째 노래의 재생을 중단하고 링크를 클릭해 영상을 재생했다. 그냥 평범한 단체곡 같은데. 그리고 나는 그 생각을 끝으로 노래가 끝날 때까지 멍하니 창가에 서 있었다.
“선배 그러니까 이 노래...”
“답장을 하랬더니 전화를 하네. 노래 괜찮아?”
“괜찮은 수준이 아닌데요? 너무 저희 엔딩에 딱 맞는 노래라.”
“내가 좋아하는 노래거든. 한번 꼭 다 같이 불러보고 싶은 노래였는데 이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더라.“
마음에 든 거 맞지? 단톡방에 이거 파트랑 동선 정리한 거 남겨놓을게. 이건 안무 영상이 없으니까 단체 연습 때 내가 하나하나 알려줘야 할 것 같아. 그럼 다음 연습 때 보자. 선배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불어온 서늘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나는 내 머릿속에 새겨진 잠뜰의 대한 모든 평가를 지우고 단 한 줄을 집어넣었다. 선배는 완벽한 부장이다. 혼자 일하는 모습이 불쌍하고 쓸쓸해 보이지만 그것을 이겨낼 만큼 완벽한 부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쓸데없는 동정심에 치우쳐 선배를 지탱할 기둥이 되어보려 한다. 그 완벽이라는 지붕이 부서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기둥을, 나는 자처하려 한다.
그 후로는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잠뜰 선배의 개인 지적을 통해 안무와 노래를 완벽하게 익히고 누구 하나 뒤처지는 사람 없이 완벽에 가까운 상태로 무대 준비를 마쳐갈 수 있었다. 그렇게 평소와 같은 똑같은 일상에서 조금 변한 것이 있다면 하교를 같이 하는 수현이 요즘 부장에 대한 불만을 단 하나도 토로하지 않는 나를 좀 신기하게 바라보는 것 정도랄까. 그 외에는 잠뜰 선배가 늘 주말 연습 시간에 한 시간씩 늦는 것까지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일상이었다.
평소와 같이 수현과 하교를 하려던 날이었다. 간만의 연습 없는 날이었기에 빠르게 집에 가는 것에 기뻐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려 했다.
“너 잠깐 나 따라와라.”
“네?”
신이시여. 정녕 제 인생에 정시 하교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건가요. 그렇게 난 다시 잠뜰 선배의 손에 카페로 질질 끌려가게 되었다. 황수현 이 자식, 감히 날 버리고 튀어? 너는 내일 각오해라. 그렇게 데자뷰를 느끼며 또 다시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다소곳하게 의자에 착석해 있었다.
“민초 좋아해?”
“그냥 그래요.”
그럼 이번에도 핫초코로 시킨다. 알아서 하세요. 뭐가 됐든 쌍화차에 휘핑크림 올리지만 않는다면야. 그렇게 우리는 각각 민초프라페와 핫초코를 앞에 두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3분 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탓에 핫초코는 목구멍으로 넘길 수 조차 없었고 먹은 것도 딱히 없는데 체한 기분이 들었다. 이 카페가 어색한 공기로 완전히 채워지기 전, 선배가 무언가를 말했다.
“나 아마 이번 활동을 끝으로 동아리 나갈 것 같아.”
컥, 쿨럭, 켈록. 갑작스러운 통보에 사레가 들렸다. 네? 쿨럭, 아니 잠시만요, 제가 잘못 들은 컥, 건지. 잠뜰 선배는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다 휴지 두 장을 건네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각별한테 대충 이야기 들었지? 하여간 하는 짓도 없으면서 쓸데없는 일은 엄청 잘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 몰랐거든. 평소보다 한층 가라앉은 선배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내 귀로 전해졌다. 선배가 말하는 글자 하나하나가 내 귀에 날아와 앉을 때마다 세상이 쿵 하고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번 무대 잘 부탁해. 우리 하나뿐인 기획자님.”
눈앞이 깜깜해진 것 같았다. 선배는 그런 내 속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를 두어번 툭툭 치고는 카페를 나가려 했다. 나는 한낱 부원이다. 내가 아무리 선배를 지탱해줄 기둥이 되길 마음먹었다 하더라도 학교의 작은 동아리에 있는 배우이자 하나뿐인 기획자일 뿐. 그런 내가 무슨 수로 깊은 사정이 있는 부장을 나가지 말라며 잡을 수 있겠는가. 나에게는, 고작 부원일 뿐인 박덕개에게는 박잠뜰의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축제에 선배 가족 와요?”
안 온다고 해도 불러요. 꼭 불러서 선배 무대만큼은 보고 가달라고 해요. 내가 기획자로서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 줄 테니까요. 어쩌다 내가 선배의 일에 이렇게 간절해졌을까. 그저 학교 선후배이자 같은 동아리라는 한 그룹에 묶여있는 관계일 뿐이었는데.
“선배가 가장 빛나는 모습 한 번쯤은 보여줘야 안 억울할 거 아녜요. 제가 본 영상 속의 선배는 그 누구보다도,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났으니까.”
그럼 갈게요! 정리되지 않은 말을 마구 뱉어낸 후 카페를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낯간지러운 말을 오랜만에 뱉어서 그런지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내 말에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던 선배의 얼굴이 계속해서 생각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웃으며 달렸다. 선배에게, 부장에게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 주겠다는 다짐을 가슴 속에 품은 채.
그리고, 대망의 축제날이 다가왔다.
본 무대를 하기 전 참가자들은 짧은 리허설을 한 번씩 해야 했다. 맞춘 무대 의상을 다 같이 입고 무대 뒤에서 개인 연습을 마지막으로 한번씩 하는 부원들을 나는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큰일 났다. 내가 무대공포증이 있다는 사실을 17년 인생에서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우리 팀의 리허설 차례가 다가오자 덜덜 떨리는 손을 꼭 잡은 채 무대 위를 향해 한 발짝씩 올라갔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심호흡을 한두 번 하고 오케이 신호를 보내자 반주가 흘러나왔다.
“너 괜찮은 거야?”
“ㄴ, 네?”
실수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파트를 그만 놓쳐버렸다. 눈앞이 마구 떨리며 시야가 뿌예져 오자 그와 동시에 머리가 새하얘지며 가사가 생각이 나지 않았고 몸이 굳어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저희 팀 리허설 빼도 괜찮을까요? 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요.”
“선배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따가 본 무대 오르고 싶으면 당장 대기실로 들어가.”
“넵.”
무대를 내려오자마자 다리가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런 거 무서워하면 말해주지 그랬어. 저도 지금 알았어요. 라더가 따라주는 따뜻한 물을 건네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따뜻한 물이 속에 들어가자 손 떨림이 조금씩 멎는 것 같았다.
관객 없는 리허설에서도 이렇게 실수하는데 본 무대에서 이러면 어떡하지? 우리의 마지막일 수도 있는 무대가 이렇게 끝나버리면 어떡하지? 걱정들이 한데 섞여 속이 울렁거렸고 불안했던 탓인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잠뜰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어떡, 어떡하죠. 저 때문에 무대를,"
“야 덕개.”
“차라리 저를 빼고 하는 게 더,”
“박덕개.”
너네는 잠깐 나가서 밥 먹고 와. 잠뜰 선배의 한 마디에 순식간에 대기실에는 선배와 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또다. 또 카페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무겁고 어색한 공기가 대기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너 무대 세울 거야.”
너도 서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부정할 수 없는 선배의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한 달간의 짧은 시간동안 노력한 부원들의 노력을 나 하나 때문에 헛되이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 마지막 무대를 완벽하게 만들어 준다며. 긴장하지 마. 괜찮아. 무대에는 너 혼자가 아닌 다른 부원들이 함께 있잖아.”
“......”
“그리고 무엇보다, 무대에서 노래할 너의 모습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빛날 테니까. 무대는 나 혼자만이 만들어가는 게 아니야. 너는 내가 그 누구보다도 빛난다고 했지만 춤추고 노래하는 내가 빛나는 이유는 옆에서 서로를 비춰줄 팀원이라는 불빛이 있기 때문이거든."
선배의 말이 끝나자 뿌옇던 눈앞이 결국 완전히 흐려져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야, 야 울라고 한 얘기 아닌데. 울면 너 무대 화장 지워진다. 뚝 해, 뚝. 갑작스러운 눈물에 당황하는 선배가 급히 건네는 휴지 두어장을 받으며 계속해서 울었다.
“제가, 제가 꼭 완벽한 무대를 만들, 어 드릴게요.”
내 말에 잠시 휴지 뽑는 걸 멈춘 잠뜰 선배가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자신에게 완벽한 무대란 모두가 빛나고 웃으며 즐길 수 있는 무대라는 말과 함께.
“그럼 지금부터 들성고등학교 축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축제가 시작되었다. 댄스부, 밴드부, 치어리딩부를 비롯한 여러 동아리들과 개인이나 팀을 이루어 무대를 진행하는 일반 팀들의 무대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무대들이 하나씩 끝나갈수록 우리의 무대가 다가왔고 나는 여전히 여전히 떨리는 손을 꼭 붙들었다. 아까와는 달리 편안한 마음을 가진 채로.
“벌써 마지막 무대네요. 들성고 뮤지컬부의 학생들이 꾸미는 환상적인 무대, 지금 시작합니다!”
떨리는 다리를 무대에 내디뎠다. 아까와 똑같이 떨렸지만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차고 넘치게 들었고 조명이 켜지며 반주가 시작되자 비로소 나는 모든 짐을 내려놓은 채 무대를 즐길 수 있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대를 놓지 않았다. 우리가 계획했던 지금은 우리의 최고의 순간이니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우리이지만 우리는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을 축복할 것이다. 우리의 기억들은 영원히 남아 기억될 것이다.
나의 남은 삶이, 우리의 남은 모든 삶이 한 편의 하이스쿨 뮤지컬일 테니까.
무대가 무사히 끝났다. 모두의 하모니로 즐기며 이루어낸 이 완벽한 무대를 마친 후 나는 잠뜰 선배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선배는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
그렇게 우리의 무대가 사람들의 박수갈채 속에서 막을 내렸다. 들성고 뮤지컬부의 다신 없을 완벽한 부장, 박잠뜰의 마지막 무대라는 슬프지만 빛나는 꼬리표를 단 채로.
이름, 박덕개. 나름대로 착실한 생활을 하고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자 들성고 일학년 삼반 뮤지컬부의 잡일꾼. 여전히 내 뒤에 남아있는 들성고 엘사라는 꼬리표에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묻는다. 이미지 세탁 하려고 뮤지컬부 들어간 거 맞죠? 옛날의 나라면 딱 잘라 아니오라 대답했을 그 질문에 지금의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뭔 헛소리래. 제가 즐기고 싶어서 들어간 건데요.”
비록 나 혼자 파란색 공을 맡았지만 다른 이들 또한 각각 다른 색을 맡아 각자의 개성을 뽐내는 이 왁자지껄한 동아리에 만족한다. 이것은 하나밖에 없을,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아름다운 내 청춘을 담은 뮤지컬의 일부분. 이후에도 수없이 이어질 장면들과 커튼콜이 남아있는 네버엔딩 뮤지컬이니까.
Track List 00. High School Musical을 반복 재생합니다.
# 많이 이른 커튼콜
꼬리표는 언젠가 잘려 나가기 마련이다. 들성고 엘사라는 꼬리표도 아마 내가 졸업하면 잘려 나갈 표딱지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언젠가 잘려 나가는 꼬리표를 스스로 자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공연을 끝마친 후의 선배는 스스로 자신의 꼬리표를 잘라내었다. 내가 달았던 마지막 무대라는 꼬리표를 박잠뜰의 의지라는 칼날로. 재녹음_Track List 00. Never Ending High School Musical을 재생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원점이 되어 돌아왔다. 더 풍성한 사운드와 희망찬 멜로디를 가진 채로.
Written by. 스케치북
Drawn by. 헤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