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눈이 비 오듯 내렸다. 바닥이 흰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수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어 입김을 내뱉었다. 그리곤 실감했다. 드디어 졸업이구나. 품에 안겨있는 졸업장과 여러 가지의 꽃다발들이 이상하게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게 벌써 엊그제 같은데, 우리는 벌써 어른이 됐다. 수현은 2년 전 자신이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 당시의 자신에게는 너무 커다래서 어색했던 학교, 키가 더 클 것을 고려해서 크게 맞춰버린 커다란 교복. 그때 수현의 손바닥 반을 가렸던 교복은 수현에게 딱 맞는 교복이 되었다. 어리숙했던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며 한참을 과거를 곱씹고 있자니, 수현의 뒤에서 친숙하고도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야, 황수현! 여기 있었냐?”
“어, 공룡아. 너 어디 있었어?”
“나 잠깐 교실에. 너도 알다시피 날 찾는 사람이 좀 많잖냐.”
“뭐래.”
뒤에서 자신에게 어깨동무를 해오는 공룡에게 차디 찬 말을 한 수현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라더는? 몰라. 나 교실 갔다 오니까 없던데. 어휴, 잘하는 짓이다. 아니, 이게 내 탓이냐?! 질린 표정으로 공룡을 향해 독설을 뱉은 수현은 옆에서 억울하다는 듯 온갖 언변을 토하고 있는 공룡을 가볍게 무시한 채, 방금 전 공룡의 어깨동무 때문에 흐트러진 연보라색 목도리를 바로 했다. 귓가에 야! 무시하냐, 황수현! 라는 소리가 마저 귀를 타고 흘러왔지만 수현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공룡의 말을 흘겼다. 그렇게 공룡의 말을 전부 무시하고 서 있던 수현의 옆에서 공룡이 자신의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수현아, 저거 라더 아니냐? 말을 듣고 수현은 운동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도 톡 튀는 빨강머리는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이 라더라는 걸 말해줬다. 라더? 어! 맞네! 라더라는 걸 알게 되자 둘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오고 있는 라더를 보곤 손을 붕붕 흔들며 소리쳤다.
“야! 서라더 여기!”
“라더야 빨리 와~!”
손을 흔들고 있는 공룡과 수현을 본 라더는 설렁설렁 걸어오고 있던 발걸음을 멈추고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가고 있어! 멀리서 들리는 라더의 목소리에 공룡은 작게 킥킥대며 말했다. 오면 지각비 뜯어야지. 어우, 야! 요즘 라더 돈 없다고 했어. 하지 마. 아 그냥 장난이지! 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러냐~. 뭔 농담 하나도 제대로 못 하겠네.
수현에게 쿠사리를 먹자 살짝 마음이 상한 공룡은 툴툴거리며 신경질적으로 신발 밑창을 질질 끌다가 발 끝에 걸린 돌을 가볍게 찼다. 멀리도 날아가는 작은 돌을 보며 공룡은 속마음으로 우와 사장님~완전 나이스 샷! 이러고 혼자 실실거렸고, 그런 공룡을 수현이 한심하게 바라봤다. 공룡이 그러고 있는 와중에 라더는 겨우 수현과 공룡의 곁으로 뛰어와 턱 끝까지 달아오른 숨을 고르고 있었다. 동시에 눈이 딱 마주쳐버린 라더와 공룡은 서로를 보곤 이내 말을 내뱉었다.
“정공룡, 어디 있었어?”
“서라더 너 어디 갔었냐?”
서로를 향했던 말이 허공에 부딪혔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공룡이 도저히 먼저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살짝 눈치를 보던 라더가 말했다. 난 화장실 갔었는데. 애들이랑 얘기 길어질 거 같아서, 그냥 다녀왔지…. 엥? 말하고 다녀오지. 몰랐잖아! 얘기하고 있는데 방해되잖아. 라더가 잔뜩 그늘진 표정으로 뒷목을 긁으며 웅얼거렸다. 그 모습에 작게 혀를 찬 공룡은 움츠려있는 라더의 어깨를 세게 팡팡 두드려주곤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하여간 그렇게 안 생겨서는 의외로 소심하다니까~! 이렇게 맘이 여려서~이 험난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까, 우리 라더는~. 은근히 놀리고 있는 말투에 라더는 잠깐 발끈했지만 공룡의 말에 솔직히 반박할 수는 없었다.
…죽는다. 목을 긁는 낮은 목소리에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은 공룡은 이크, 하는 작은 탄성을 내뱉곤 라더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황급히 내렸다. 네가 라더 좀 챙겨줬음 됐잖아. 어색하게 뒤통수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공룡의 옆구리를 수현이 툭툭 쳐대며 눈치를 줬다. 아 씨, 그걸 내가 알았냐고…. 공룡은 입을 삐죽 내민 채 허공에 눈을 부라렸고 수현은 잔뜩 열이 오른 라더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말을 건네는 게 다였다. 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고, 그저 일상이었다. 공룡이 라더를 놀리고 라더가 그로 인해 토라지면 꼭 둘을 지켜보던 수현이 라더를 달랬고, 라더는 그럴 때마다 꼭 한숨을 크게 푹 내쉬고 미안하면 매점에서 햄버거나 쏴라, 정공룡. 이라 덧붙이는 게 셋의 우정이었다. 물론 그동안의 공룡의 지갑은 남아나질 않았고 말이다.
숙였던 고개를 간신히 든 라더는 공룡을 째려보며 말했다. 오늘 점심 네가 쏴. 눈빛으로 흠씬 두들겨 맞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던 공룡은 입꼬리를 힘껏 올리고 헤벌레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한참을 운동장 근처에 서 있자 슬슬 졸업식이 끝나간다는 걸 느꼈다. 만날 사람 다 만났지? 수현의 말에 라더와 공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니 만났고, 티티도 만났고…아, 이신이랑 우재랑 필립이도 아까 만났다. 안 만난 애들은 바빠서 못 왔으려나. 그래도 이 정도면 다 만났네. 손가락을 펼치곤 하나씩 접어가며 중얼거리던 수현은 전부 접히고 새끼손가락만 덜렁 남아있는 걸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가만히 서서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던 수현은 이내 놀란 토끼마냥 눈을 크게 뜨곤 저도 모르게 공중에서 박수를 쳤다. 짝! 하는 소리에 쭈그려 앉아서 운동장에 낙서를 하던 공룡과 라더가 동시에 수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뭐하냐며 눈으로 묻는 둘에게 수현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덕개 안 만났어! 수현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학교 뒷문에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뛰어오는 한 인영이 보였다. 찬 바람에 이리저리 제멋대로 휘날리고 있는 밀색 머리카락, 꽉 감은 눈매와 바람을 잔뜩 맞아 멀리서도 확연히 보이는 새빨개진 볼따구. 겉옷은 또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겨울바람을 견디기엔 한없이 얇은 셔츠 차림. 어디로 보나 덕개였다.
뛰어오는 덕개의 품엔 무언가 들려있었는데,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이내 점차 덕개가 가까워지자 셋은 덕개가 소중히 들고 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사탕 다발 세 개. 오다가 혹여라도 떨어질세라 손아귀가 새하얘질 정도로 세게 쥐고 있는 모습이 마냥 애처로웠다. 그런 덕개의 모습에 순식간에 어벙해진 셋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서로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온다더니, 제 얘기를 하는지는 어떻게 알고 저렇게 뛰어오고 있는지. 또 소중하게 들고 온 알록달록한 사탕 다발은 또 뭔지. 많은 생각이 거쳐 가는 사이 덕개는 셋의 코앞까지 와 열뜬 숨을 내쉬었다.
수현이 말을 꺼내려던 찰나, 한참을 고개를 푹 숙이고 후아-. 하며 반복적인 숨을 뱉던 덕개는 놓칠세라 꼭 껴안고 있던 품 안의 사탕 다발들을 셋에게 내밀었다. 부들거리는 어깨가 보였다. 동시에 다발들을 간신히 들고 있는 손이 위태롭게만 느껴졌다.
“졸, 업…축하해….”
고개는 여전히 푹 숙인 채,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말하는 덕개에 이상함을 느낀 라더가 물었다. 덕개야, 너…울어? 라더의 말이 끝나자 수현은 당황해하며 덕개에게 기웃거렸고, 공룡은 진짜 우냐며 허리를 낮추고 덕개의 얼굴을 보려 애썼다. 덕개는 그런 셋의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은지 어깨를 떨어가며 잠긴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졸업 축하, 한다고오…. 흑, 윽, 우으…허어어엉…. 덕개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셋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눈물 자국이 그득했고, 눈꼬리가 붉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방울들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다 가면 나 어떡해…나 이제 진짜 혼자인데…. 흐윽, 으으으…. 셋에게 사탕 다발을 내민 손은 거두지 않은 채로 덕개는 숨을 삼키며 계속 엉엉 울었다. 울음이 잔뜩 묻은 목소리는 한없이 처량하기만 했다. 손까지 벌벌 떨어가며 울어대는 덕개에 수현은 괜히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각별형이랑 잠뜰누나 갈 때도 이렇게까진 안 울었는데…진짜 혼자 남기 싫었나 보네. 실없는 생각을 한 수현이 픽 웃으며 덕개 손에 있던 사탕 다발을 받아 한 개는 제 품에, 나머지 두 개는 각각 공룡과 라더의 품에 안겨줬다.
그리고 꽃다발도 아니구. 사탕 다발…진짜, 어쩜좋아….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을 찡그린 수현은 손을 뻗어 덕개의 머리에 얹었다. 바람을 맞아 차가워진 얇은 머리카락이 수현의 손에 생생히 느껴졌다. 덕개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로 방긋 웃은 수현은 이내 머리카락이 엉망이 될 정도로 덕개를 쓰다듬으며 마저 웃었다. 기특하다, 기특해! 형들 줄라고 이런 것도 사 오고. 그 바람에 머리칼이 그야말로 개털이 된 덕개는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평소처럼 수현에게 씩씩 화를 표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마냥 입을 다물고 있던 공룡과 라더도 어느새 풀린 분위기에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공룡은 실실 웃곤 어이구, 우리 덕개가 형들 가는 게 그렇게 싫었어요~. 라며 덕개를 놀리듯 말했지만 공룡은 마냥 기뻐 보이는 듯했다. 한참을 울어 눈두덩이가 뻘게진 덕개는 이제 슬슬 진정이 된 건지 앞에서 펑펑 운 게 쪽팔려 보였다. 오죽하면 추위에 달아올라있던 볼이 더 빨개져서는 눈가를 비비고 있었다. 그럼에도 볼까지 타고 내려온 눈물 자국은 도저히 가릴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추위가 느껴지는 건지, 겉옷도 없이 교복 셔츠만 덜렁 입고 달려온 덕개는 코를 훌쩍였다.
“너 근데. 겉옷은 어디다 두고 왔어? 목도리도 없고….”
“형들 보자마자 급하게 나온 거라…교실에 두고 왔…에, 에취!”
나름 걱정이 묻은 라더의 물음에 결국 재채기까지 해버린 덕개가 몸을 덜덜 떨었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얼른 가서 가져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덕개의 등을 떠민 수현이 말했다. 덕개는 몸을 감싸곤 왔던 길로 허둥지둥 뛰어갔다. 그런 덕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탕 다발을 만지작거리던 수현이 조용히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나 솔직히 울 뻔했어…감동 먹어서. 그런 수현에 말에 잠시 정적이 있더니 이내 공룡과 라더도 …나도. 란 공감의 말을 표했다. 근데 나 단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제 손에 들린 사탕 다발을 지긋이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리던 라더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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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 목도리를 흐트러트린 채로 덕개가 뛰어왔다. 오는 길에 세수까지 하고 온 건지 부어있었던 눈이 잘 멀리선 잘 티가 나지 않았다. 수현은 덕개에게 슬쩍 다가가 사탕 다발에서 뺀 오렌지 사탕을 건네며 헤실헤실 웃었다. 쨘~덕개맛. 이거 먹구 다음엔 울지 말기. 약속~. 장난스럽게 덕개의 눈앞에 새끼손가락을 딸랑딸랑 흔들자 열이 돋친 덕개가 수현의 팔을 떨쳐내며 성질을 냈다. 이게 왜 덕개 맛이야? 주황색이니까 덕개맛이지. 가지가지 한다. 아, 짜증 나니까 말 걸지 마 황수현! 소리를 버럭 지른 덕개가 셋을 스쳐 화난 발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괜히 부끄러워서 저러네~. 한술 더 뜬 공룡이 후드에 손을 집어넣고선 실실거리며 이죽댔다.
앞서간 덕개를 따라 교문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셋은 교문 밖을 바라보며 넋이 나가 있는 덕개를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덕개가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곳을 바라본 공룡은 턱이 빠질세라 입을 쩍 벌리곤 어버버 거렸다. 뭔데 그래? 갸웃거리며 교문 쪽으로 시선을 돌린 수현은 교문 밖에 우뚝 선 익숙한 인영에 되려 놀라고 말았다. 라더도 뒤따라 본 건지 수현의 뒤에서 뭐야? 하는 실없는 탄성이 들렸다.
“우리가 조금 늦게 왔나?”
교문앞에 서 있던 잠뜰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겨울이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량하고도 시원한 웃음. 그 웃음을 보자마자 수현은 놀란 토끼마냥 놀란 눈을 했다. 미안. 연락도 못하고 와서. 오랜만에 만난 잠뜰은 여전했다. 올라간 눈초리에, 어깨를 겨우 덮는 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단정한 옷차림까지. 이제는 익숙해진 겉모습이었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정말 어른이라는 됐다는 느낌일까.
정신을 차린 넷이 잠뜰에게로 모여들자 잠뜰은 또 웃었다. 오랜만에 본다. 그치. 그 말에 덕개는 그쳤던 눈물을 또 한 번 흘렸고, 수현과 라더는 그동안 잘 지냈냐며 담백하게 안부를 물었다. 공룡은 오랜만에 만나서 나름 훈훈한 분위기를 깨부술 참인지 잠뜰을 놀렸다가 정강이를 크게 얻어맞았다. 악! 하고 정강이를 잡고 주저앉은 공룡을 보자 왠지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 들던 찰나, 잠뜰의 옆에 그림자가 지며 나긋한 목소리가 하나 튀어나왔다.
“나는 신경도 안 쓰냐?”
완전 찬밥 신세네. 섭섭하게 시리…. 잠뜰의 옆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각별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악! 깜짝이야!! 놀란 덕개가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에 놀란 라더가 살짝 몸을 움츠렸다. 바로 옆에 서 있었는데 못 본 건 너희잖아. 각별이 낮게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낮은 목소리는 자다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잠긴 목소리였다. 보아하니,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잠뜰에게 끌려온 것 같았다. 가끔 아침에 복도에서 만나면 꼭 저런 목소리로 설렁설렁 인사를 건네곤 했었다. 헐 전봇대인 줄 알았는데 각별이었네~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키득거린 공룡이 각별을 놀리는 투로 말했다. 각별은 그런 공룡을 보며 뒤진다 정공룡이라 했고, 공룡은 또 해골이 쳐봤자 안 아픔ㅋㅋ이라며 각별을 도발했다. 마치 각별이 졸업하기 전 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수현은 그 모습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점점 심해지는 말싸움에 이러다간 서로 멱살까지 잡을 것 같아 둘 사이를 주먹으로 중재시킨 잠뜰이 시원하게 웃었다. 역시 매가 약이지. 거기에 괜히 기가 눌려버린 덕개는 비 맞은 강아지마냥 잠뜰의 눈치를 봤다. 잠뜰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며 셋에게 꽃다발을 하나 건넸다. 잠뜰이 옆구리를 툭툭 쳐대자 각별도 느린 몸짓으로 꽃다발을 들어 건넸다.
“졸업 축하해.”
“졸업 축하한다….”
비록 졸업식이 끝나고 한참 뒤에 받은 축하였지만, 그렇기에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런데…졸업한 사람은 셋인데, 꽃다발은 합쳐서 두 개? 뭔가 이상함을 느낀 수현이 잠뜰을 바라보자 꽃다발을 내밀고 있던 잠뜰이 푸하하 웃으며 말했다. 너희 셋한테 같이 주는 거야. 어떻게, 너희끼리 잘 상의해서 나눠 가져라~. 옆에 있던 각별도 고개를 끄덕이며 꽃다발을 대충 셋 중 한명에게 안겨줬다. 아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어이없다고 생각하던 수현이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입은 미소 짓고 있었다. 제 입가를 만져본 수현은 또 푸스스 웃었고, 그와 동시에 꽃다발을 건넨 각별이 잠뜰이 시선을 맞췄다.
“야, 타라.”
각별이 환하게 웃으며 엄지로 제 뒤쪽을 가리켰다. 뭘 타라고? 손가락을 따라 각별과 잠뜰의 뒤를 바라본 넷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건 분명히 차였다. 갑자기 처음 보는 차를 타라고 하는 통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각별과 잠뜰을 바라보자, 잠뜰이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눈웃음을 지었다. 렌터카 빌린 거야. 당일치기라서 빨리 가야 하니까 얼렁 타라~. 시리도록 차가운 웃음에 넷은 쭈뼛거리며 뒷좌석에 낑겨탔다. 당연히 면허가 있는 각별이 운전하겠지-했지만…운전석에 타는 건 각별이 아닌 잠뜰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수현이 누나…면허 없지 않아? 리고 묻자마자 잠뜰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을 위해서 면허를 땄지.”
미친 잠뜰! 잠뜰의 말을 듣자마자 공룡이 차 문을 덜컹, 덜컹하고 흔들었다. 손잡이만 흔들릴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라더는 이미 체념 했는지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고, 덕개는 누나...?? 누나 아니지...? 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수현은 각별의 어깨를 흔들며 형 알고 있었지! 이 미친 인간아!! 라고 소리칠 뿐이었다. 각별은 수현에게 되는대로 흔들리며 나만 죽을 수 없지~라며 푸하학 웃었다. 순식간에 초토화가 된 차 안이 어수선했지만, 잠뜰은 이미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차에 시동을 걸었다. 죽기 싫어어어-!!! 공룡의 애처롭고도 새 된 비명이 차 안을 울렸지만, 이미 그들의 차는 빠른 속도를 내며 학교 앞을 떠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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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세차게 달리자 창문 밖 풍경들이 빠르게 바뀌었다. 가지만 덜렁 남은 나무들은 정말 겨울이 왔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해주고, 구름 한 점 없고 참 파랬던 겨울 하늘은 차 안에서 보자 왠지 모를 이질감이 물씬 느껴진다. 공룡은 여전히 앞 좌석을 부여잡은 채로 날 죽일 셈이냐며 찡찡거렸고 덕개와 수현은 그새 잠들었다. 하긴, 둘은 차만 타면 줄곧 잠에 들고는 했다. 버스를 타든 택시를 타든. 저번에는 등교하다가 버스에서 잠들어서 나란히 지각했었던 적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뜰누나가 핸들을 잡은 이 차 안에서…이렇게 편하게 잘 수 있나? 제 오른쪽 어깨에 기대어 자는 수현과, 수현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는 덕개를 바라봤다.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네.
나무 수십 개를 지나치자 시끄럽던 공룡도 어느새 잠들었고 각별은 이미 잠든 지 오래였다. 잠이 워낙 없는 라더는 창문만 바라보며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수현이 기대고 있는 어깨가 조금 뻐근했지만 그렇게 아프지는 않아서, 라더는 운전 중인 잠뜰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점이 생겼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교문 밖이 나오자마자 정신없이 축하를 받고, 차에 타라는 말에 탔더니 갑자기 당일치기 여행을 하자니. 게다가 운전자는 잠뜰이었다. 각별과 잠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를 위한 일이란 건 라더는 잘 알았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몸에 힘을 빼고 어깨를 내주고 있던 라더가 잠뜰을 지긋이 바라봤다. 핸들을 잡은 채 내내 등만 보이던 잠뜰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바다보러. 바다? 라더가 되물었지만 잠뜰은 말이 없었다. 바다라. 잠뜰은 유독 바다를 좋아했고, 바다의 파도마냥 시원한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본 사람들은 그가 바다와 똑 닮았다고 말했다더라.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고, 강렬한. 잠뜰은 그런 색이었다. 것도 모자라, 잠뜰은 꼭 자기소개를 할 때면 좋아하는 것은 바다와 고래라고 줄곧 말하곤 했었다. 라더는 그럴 때마다 정말 한결같이 바다를 좋아하는구나-싶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자니 언뜻 보이는 창밖으로 푸른 바다가 고개를 내밀었다. 창문을 열지 않았음에도 코 끝에 바다 내음이 스친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라더를 백미러로 올려다본 잠뜰이 물었다.
예쁘지?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잠뜰을 보자 그의 눈에도 역시 바다가 찰랑이고 있었다. 누나는 역시 바다랑 닮았구나. 창문 밖에서 비친 바다였음에도 라더는 깨닫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바다에서 파도가 출렁거렸고,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모래가 눈에 톡 띄었다. 라더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솔직히, 바다는 예뻤다. 잠뜰이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만도 같아서 라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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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다!”
차 안에서 내려 끄응, 하고 한 번 기지개를 핀 공룡이 눈에 바다가 담기자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중학교 이후로 처음 오는 바다였다. 해변에 조심스레 발을 내딛자 발밑을 감싸주는 모래의 느낌도 그대로였다. 운동화에 모래가 들어갈까 하는 걱정에 신발과 양말도 벗고 모래에 오르자 발가락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모래가 느껴졌다. 공룡은 한참을 발로 모래를 차대다가 옆에 있던 덕개를 불러 모래성을 짓기도 했고, 핸드폰으로 바다를 찍어대며 인스타용 사진을 뽑아내던 수현은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멀뚱히 서 있는 라더와 같이 셀카를 찍기도 했다. 물론 라더는 평소에 사진 찍는 걸 무척 싫어했지만, 오늘 같은 날에 한 번만 찍어달라는 수현의 부탁에 홀랑 넘어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에 담겼다.
뒤에서 넷을 바라보고 있던 잠뜰과 각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데려오길 잘했지? 응. 돈 쓴 보람이 있네. 비록 시간이 없어 당일치기 였지만 여행을 계획한 둘에겐 꽤 만족적인 반응이었다. 잠뜰과 각별은 제 졸업식에서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던 넷을 떠올렸다. 졸업하지 말라며 거의 바짓단을 잡고 늘어지는 덕개. 이렇게 가버리면 매점빵은 누가 사주냐며 투덜거리던(이렇게 말했어도 마지막엔 가지말라며 엉엉 울음을 터트린)공룡. 취직하면 맛있는 거 사달라며 부은 눈으로 꽃다발을 내밀던 수현과, 뒤에서 아무 말도 없이 눈물을 꾹 참던 라더까지. 잠뜰과 각별은 가능하면 이 넷에게 행복한 추억을 더욱 더 심어주고 싶었다.
잠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각별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어때? 잠뜰의 짧은 물음에 각별이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을 툭 내던졌다. 좋지. 대답을 들은 잠뜰이 해변에서 아무렇게나 놀고 있는 넷에게 물었다. 얘들아, 재밌는 거 할래? 모래로 노는 것도 슬슬 질렸던 넷은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잠뜰을 바라봤고, 잠뜰은 밝게 웃으며 가위바위보 진 사람 10초 동안 바다에 발목넣기~안 내면 진 거 가위바위보! 말을 끝내자마자 잠뜰은 가위바위보를 재빨리 말하며 기습으로 주먹을 냈다. 공룡 주먹, 수현 가위, 라더 가위, 각별 주먹, 덕개는….
“덕개 안 냈다~”
“아! 모래성 만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러는 게 어딨어…!”
확실히 잔뜩 흐트러진 모래성이 덕개의 손 밑에 있었고 손은 모래투성이였으나 그건 그거고 못 낸 건 못 낸 거였다. 같이 만들고 있던 나는 냈는데ㅋㅋ역시 덕개 느리죠? 덕개가 들어갈 분위기가 조성되자 공룡은 이때다 싶어 덕개를 실컷 놀려댔다. 그건 공룡 니가 배신 때리고 먼저 손 빼서 그렇잖아, 이 배신자 자식아!! 공룡의 얄미운 태도에 소리를 빽 지른 덕개는 재발 한 번만 봐주라고 빌빌거렸지만 결과는 뻔했다. 혼자서 발목만 넣을래, 아님 몸까지 통째로 담가질래? 잠뜰의 흡사 조폭 같은 언행에 덕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신발과 양말을 벗고 파도가 찰랑거리고 있는 곳에 우뚝 섰다. 철썩이는 파도가 발 끝을 간지럽혔다.
아, 겨울 바다면 진짜 얼어 죽을 텐데…저 누나 싸패 아니냐고오-! 마음속으로 울분을 토한 덕개는 맞을 매도 빨리 맞으면 안 아프다-라는 말을 읊으며 천천히 바다에 발을 담갔다. 차가운 통증이 발목을 조여왔다. 발의 감각이 없어져 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얼음으로 만든 신발을 신은 것 같은 기분에 덕개는 허공에 악악 거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뒤에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소리와 수현과 공룡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와중에 이래도 되냐는 라더의 물음도 함께 들렸다. 10초가 지나고 후다닥 발을 뺀 덕개는 오들오들 떨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미쳤냐고! 아 억울해서 못 살겠네, 진짜!”
“음…덕개가 너~무 억울해하니까 지목제로 바꿀까?”
덕개가 선택하는 걸로. 덕개 불만 없지? 헐 응!! 당연하지 누나!! 덜덜 떨다 못해 재채기까지 해버릴 뻔했던 덕개는 잠뜰의 말을 듣자마자 구부정했던 허리를 쫙 펴고 제 눈앞에 있는 다섯명을 스캔했다. 어쩐지 불안한 표정의 수현과 공룡,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덕개를 바라보고 있는(감기라도 걸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걱정을 해버린)라더. 그리고 이 상황이 즐거운지 히죽 웃고 있는 잠뜰과 각별까지. 덕개는 아까 전, 차가운 바닷물에 발목을 담갔을 때 들었던 비웃음 소리를 다시 회상했다. 동영상을 찍는 띠링 소리와 웃고 있던 수현과 공룡…정했다!
“야! 정공룡 황수현! 너희도 내 고통을 느껴봐라, 이 악마 같은 놈들.”
“덕개야, 악마? 악마아아아? 나같이 천사 같은 사람이 또 어딨다구?”
“와 미쳤네…황수현 네가 할 말은 아니다ㅋㅋ”
어 시끄러워 정공룡~너도 똑같아~. 공룡의 말에 수현이 덧붙였다. 순식간에 시끄러워진 분위기가 해변 한가운데를 감쌌다. 공룡과 수현은 두 명이 지목됐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니가 들어가라, 아니 니가 들어가라-하며 서로를 차디 찬 바다로 떠밀고 있던 찰나, 결국에 잠뜰로 인해 둘이 사이좋게 발목을 입수했고 나오자마자 연신 재채기를 해댔다. 둘의 곁에서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겠냐면서 깐족거리는 덕개는 덤이었다. 라더는 그러게 동영상은 왜 찍었냐며 공룡과 수현을 타박했지만, 그러면서도 둘에게 제 겉옷을 빌려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해변에 앉아있었고, 가만히 있는 게 무료했던 수현은 모랫바닥에 쭈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해변에 낙서를 했다.
귀여운 수현이 다녀감~^^. 또박또박 쓴 보기 좋은 글씨체가 해변 모래에 크게 새겨졌다. 옆에 윙크하는 토끼를 그려 넣자 느껴지는 만족감에 수현은 슬 웃으며 주변에 계속 낙서를 해댔다. 라더랑 얘기 중이던 공룡은 수현이 끄적거리는 걸 보곤 옆에 놓여 있던 작은 나무 막대기를 들고 수현의 글씨 옆에 제 글씨를 적어넣었다. 귀여운 공룡도 왔다 감~ㅋㅋ. 설렁거리며 대충 쓴 글씨였지만 날리면서도 정갈함이 느껴지는 글씨체는 꽤 공룡의 맘에 쏙 들었다. 옆에 있던 수현이 공룡의 글 옆에 꽃을 든 공룡을 그리면서 와…이게 그 악필이었던 정공룡의 글씨체가 맞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라고 감탄했다. 확실히 공룡은 악필이 맞았지만,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글씨체였기 때문에 최근엔 어떻게든 잘 써보려 노력하고 있던 참이었다.
수현에게 틈이 날 때마다 글씨체 강의를 받았던 게 도움이 됐던 모양이다. 여태 자신이 했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수현이 장난스레 말했다. 공룡아, 넌 더 이상 배울 게 없단다…잘 성장해줬구나…! 눈물을 훔치는 모션을 흉내 내며 아련한 표정을 짓는 수현에, 공룡은 스승님의 은혜…잊지 않겠습니다. 하며 수현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잠뜰은 아주 쇼를 한다 쇼를 해. 라고 말하며 아까 덕개가 마저 만들지 못했던 모래성을 라더와 함께 만들어 주고 있었고, 덕개는 그 옆에서 한창 조개껍질을 줍는 중이었다. 와중에 편의점에 갔다 온 각별은 콜라와 과자 몇 봉지를 들고 와선 콜라는 공룡에게, 과자는 공룡을 제외한 나머지에게 건넸다.
엥, 콜라는 왜 정공룡 줘? 앉아있던 수현이 각별을 올려다봤다. 각별은 아까 편의점 갈 때 부탁받은 거라고 말했다. 나는 편의점 가는 것도 몰랐는데! 아쉬워하는 수현이 꿍얼거리자 옆에 있던 공룡이 깐죽거렸다. 그러게 빠르게 선점 하셨어야죠, 스승님~. 라고 말하며 콜라캔을 딴 순간, 공룡의 얼굴을 향해 부글거리는 콜라가 탄산과 함께 솟았다. 피할 새도 없이 정면으로 콜라를 맞아버린 공룡은 얼굴이 축축하게 젖은 채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갈색 액체가 모래 위로 떨어졌고, 그 순간에 각별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흡…아, 미쳤나 봐. 개웃기네 진짜-크흐흐…”
“각별 죽인다ㅋㅋ진짜 말리지 마라”
강제로 콜라로 세수를 당해버린 공룡은 끈적해진 피부를 뒤로한 채로 벌떡 일어나 각별에게 달려들었다. 각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공룡을 가볍게 피하고선 마저 웃었다. 아 진짜로 고의 아니야. 올 때 흔들렸나보지~. 얼굴이 엉망이 된 채로 제게 달려드는 공룡에 각별은 능청하게 웃으며 끝까지 공룡을 농락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현이 말했다. 어딜봐도…고의지? 그 말에 잠뜰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보고 있자니 어쩐지 콩트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수현과 잠뜰은 둘을 말리지도 않고 과자를 뜯었다. 덕개와 라더는 모래성 만드는 걸 그새 그만두고 다른 놀이를 하고 있었다. 두껍아 두껍아. 새 집 줄게 헌 집 다오.
서로 전부 다른 것을 하고 있는 통에 분위기는 점점 들떴고, 더욱 더 소란스러워졌다. 지독한 추격전 끝에 각별을 잡은 공룡은 남은 콜라를 각별에 얼굴에 들이부었고, 수현과 잠뜰은 배 터지게 웃었다. 결국 나란히 엉망인 몰골을 하고 돌아온 각별과 공룡은 근처 공중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돌아와 남은 과자를 몇 개 주워 먹었다. 짧았던 전쟁의 끝이었다.
다시금 분위기가 차분해지자 잠뜰은 가방을 뒤졌다. 여기 어디 쯤 넣어놨던 거 같은데. 하염없이 가방을 뒤적거리며 확인했지만 잠뜰이 찾는 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에 잠뜰은 각별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오빠, 그 뭐냐…우리 삼각대 어디에다가 넣었지? 입안에 과자 부스러기를 털어 넣던 각별이 입을 오물거리다가 말했다. 노란 가방에 넣었던 거 같은데. …우리 파란 가방 밖에 안 가져왔는데? 서로의 말이 오가자마자 각별과 잠뜰은 서로를 쳐다봤고, 각별은 기억해냈다. 급하게 나오느라 식탁 위에 가방을 그냥 두고 왔다는 사실을. 각별은 땀을 삐질 흘렸고, 잠뜰은 그런 각별의 태도에 한숨을 쉬었다. 아니, 니가 빨리 나오라 해서…까먹었지. 오빠가 늦잠 자서 그런 거잖아. 시선을 피하며 입을 삐죽이던 각별은 잠뜰에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고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됐다 됐어. 고개를 숙인 각별에게 대충 손을 휘적댄 잠뜰은 사진은 또 어떻게 찍어야 할지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폰카로 찍으면 너무 팔 아프고…삼각대는 없고. 아오, 오빠를 더 갈궜어야 하는 건데. 다크서클이 턱 끝까지 내려온 것 같은 기분에 잠뜰은 눈을 깜빡였다. 물론 착각이었겠지만 저도 모르게 눈 밑을 만져보았다. 피곤한 눈으로 간신히 앞을 바라보자 잠뜰은 얼떨결에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현은 항상 셀카용으로 셀카봉을 들고 다니곤 했고, 억지로 애들을 제 옆에 병풍처럼 세워놓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래놓고 인스타에 올리는 건 먹은 음식 사진이 반이었다. 셀카봉을 오늘도 가져왔는지 덕개를 옆에 두고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에 잠뜰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슬슬 해가 지고 있었고, 저녁의 바다는 주황색 물감을 푼 것처럼 예뻤다. 배경은 어떻게든 오케이였다. 수현에게 다가가 셀카봉을 빌린(얼떨결에 작은 삼각대도 받았다.)잠뜰은 노을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생각이었다. 셀카봉에 제 핸드폰을 끼우고 삼각대를 맞췄다. 원래 가지고 오려고 계획했던 삼각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작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지금으로써는 감지덕지였다. 삼각대를 조합한 셀카봉을 조심스럽게 해변 모래 위에 올려놓은 잠뜰은 손을 털고 사진을 찍자며 모두를 부르니, 하나둘 잠뜰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사진 찍는 거야?”
“어. 이거 찍고 슬슬 가야지.”
손가락을 꼼질 거리며 타이머를 맞추던 잠뜰은 슬슬 자세를 잡으라며 충고했다. 해가 져가고 있는 노을바다를 등지고 여섯은 카메라를 바라봤다. 타이머의 시간이 몇 초씩 지나갈 때마다 공룡은 장난삼아 여러 자세를 취하며 역동적인 포즈를 내보였고, 사진에 원체 관심이 없는 각별과 라더는 특별한 자세를 고집하기 보다는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며 손으로 브이만 내밀 뿐이었다. 타이머의 시간이 많이 남지 않자, 자세를 고민하던 덕개는 급기야 제 턱에 꽃받침을 했고 그런 덕개를 보며 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내리지 못한 채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3초, 2초, 1초. 카메라 렌즈가 순간 반짝였다. 잠뜰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찰칵 소리가 한적한 바닷가에 울렸고, 이내 셀카봉으로 모여든 여섯은 사진을 확인했다. 역광 때문인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게 노을바다랑은 나름 잘 어울려서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노을에 적셔진 것만 같은 사진은 결국 잠뜰의 갤러리에 담겼다. 잠뜰은 사진을 하나, 하나 곱씹었다. 겨울이었지만 따듯하고도 확연한 주황의 색에 물씬 가을의 느낌이 드는 사진이었다. 어색하게 가위만 들고 있는 각별과 라더, 무슨 생각이었는지 꽃받침을 하고 있는 덕개와 그를 바라보며 실실 거리고 있는 수현. 그리고 계속 이상한 포즈를 취해대다가 사진엔 공룡의 흉내(손가락을 세 개로 만들어 굽히고 이를 내보이고 있던)를 하고 있는 공룡까지. 모두 나쁘지는 않았다. 잠뜰은 저도 모르게 사진이 담겨 있는 액정을 쓸었다.
웃고 있는 제 얼굴 위로 액정을 스치던 손가락이 우똑 멈췄다. 참, 노을바다와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에 들어서 잠뜰은 픽 웃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현은 사진을 바라보다가 이내 아직도 노을을 머금고 있는 바다를 향해 눈을 돌렸다. 겨울의 바다였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같았지만, 후-하고 숨을 내뱉자 입 밖을 통해 나오는 새하얀 입김에 수현은 그럼 그렇지. 하고 코를 훌쩍였다. 그와 동시에 제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에 수현은 눈을 감았다. 닫힌 눈꺼풀 사이로 세찬 바람이 문을 열어달라며 아우성 치는 듯 하다. 역시 춥구나. 겨울이구나. 수현은 목도리를 올리곤 두 손으로 몸을 감쌌다. 그리고 또…졸업이구나.
다시금 곱씹고서야 겨우 실감이 났다. 봄, 여름, 가을, 겨울. 19살의 사계절을 거치고 우리는 졸업을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고등학교에서의 3년이 겨울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갔고,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여태 되고 싶었던 어른이었지만 막상 학교를 벗어나자니 어색한 기분이었다. 슬슬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던 잠뜰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너희 오늘 한 끼도 안 먹었지? 뭐라도 좀 먹으러 가자. 밥 얘기를 하자 잠잠했던 배가 고파오는 듯했다. 아침은 커녕 오늘 하루 아무것도 먹지 않은 라더가 제 배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덕개와 공룡은 밥 소리가 들리자 피곤한 듯 연신 해대던 하품을 멈추고 누가 피곤했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후다닥 차에 올라탔다.
각별은 언제 탔는지 조수석에 앉아 핸드폰을 두들기고 있었다. 잠뜰도 어느새 운전석에 들어가 앉았고, 바다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던 수현과 라더도 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기 전 뺨을 스쳤던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왜 인지 마중을 나와준 것 같아서, 차가 바다를 다 지날 때까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창문 밖 바다의 끝자락을 눈에 담고서 수현은 눈꺼풀을 끔뻑이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히터의 따듯한 바람이 뺨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수현은 슬 잠에 들었다.
19살의 끝자락을 맞이하면서.
Written by. 서영
Drawn by. 한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