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지나가는 중
"야 김각별! 빨리 오라니까? 쟤네 우리 빼고 사진 찍는다!!"
"알았다고! 이쪽도 바쁜 거 안 보이냐? 거 되게 재촉하네."
시끌벅적한 소리가 강당 안을 가득 채웠다. 곳곳에 달린 형형색색의 풍선들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졸업의 노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의 얼굴에 피어난 밝은 미소. 무대 한가운데에 걸린 [졸업을 축하합니다!] 현수막의 주변으로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의 세례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공룡이랑 김각별! 얘네 또 어디 갔어? 꽃다발을 한 아름 품에 안아 든 공룡이 각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대형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그 뻔뻔한 행동을 반장이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공룡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길치 하나 찾아온다고 늦었어. 내가 언제 길을... 공룡의 팔꿈치가 강하지 않게 각별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윽- 인상을 찌푸린 각별이 작게 욕을 내뱉으며 공룡을 째려봤다. 뒤질래? ㅋ미안. 근데 다른 데서 놀다가 늦었다고 하면 더 화낼걸? 공룡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확 뒤통수를 갈겨 버릴까 고민하던 각별은, 안 그런 척 자신들을 향한 시선들을 느끼고는 이후를 기약했다.
자, 여기 보시고. 찍는다? 하나, 둘, 셋-
찰칵!
"와, 정공룡 인생 샷 나왔네."
"어때 잘 나왔지?"
"아니. 다른 의미로의 인생 샷 말한 건데? 역시 원본이 못생기니까 사진도..."
시비냐? 시비 거는 거냐? 뭐, 싸우실? 이제 성인이나 마찬가지인 두 졸업생이 유치하게 투닥거렸다. 평소라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내저을 반 친구들이 오늘만큼은 그들을 내버려 뒀기에, 나잇값 못하는 둘의 말싸움은 강당의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지속되었다.
"어휴, 변한 게 없네. 적당히 하고 우리도 나가자."
"왜?"
"왜라니. 졸업 기념으로 바닷가 놀러 가기로 했잖아. 설마 까먹었냐?"
각별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공룡을 쳐다봤다. 순간적으로 고요해진 강당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진 것은 착각일까. 그들 사이에서는 지독하게 낯선 침묵. 공룡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너 좀 이상하다? 혹시 무슨 일,"
"아! 바다 보고 싶다, 바다! 기차 시간 맞추려면 다음에 오는 버스 타야 하지? 빨리 나가야겠네!"
"얘가 진짜 미쳤나."
질색하는 반응의 각별을 뒤로하고 공룡이 앞장서서 강당 밖으로 나섰다. 더 이상 공룡에게 각별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에 들려오는 한 명 분의 발소리. 너무나도 친숙한 발소리로 상대의 존재를 확인했다. 안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썩어버린 구렁텅이 아래에서부터 기어 나왔다. 방금 전만 해도 해맑아 보였던 모습은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생기 넘치던 눈빛이 서서히 죽어갔다. 지금 공룡의 모습은 모순 그 자체였다.
2021년 2월 3일.
오늘은 공룡의 101번째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찬바람이 불어오는 2월의 바닷가. 중천에 떠있던 해가 점차 서쪽으로 가라앉는 초저녁의 시간. 딱 놀기 좋은 환경에 공룡이 들뜬 발걸음으로 모래사장을 밟았다. 신발에 반쯤 파고드는 부드러운 모래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절로 평화로워지는 그 느낌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공룡이 가볍게 해변 위를 뛰어다녔다. 각별도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해변에 발을 디뎠다.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평화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까의 잔잔한 물결같은 평화는 어디갔는지 공룡이 한 발로 아슬아슬하게 서서 양말 속에 들어간 모래를 빼내기 위해 신발을 벗으며 균형을 잡았다. 으, 따거. 그런 그를 보며 각별이 한숨을 쉬었다. 무식하게 모래 더미를 밟냐. 못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보고도 밟은 거면서 거짓말은. 공룡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치켜 올라갔다.
"나만 당할 수는 없지!"
"뭐, 야!! 이 미친놈아!!!"
공룡이 각별의 팔을 잡고 거세게 잡아당기자 각별의 발이 모래 더미 속에 푹 파묻혔다. 거기다가 마침 밀려 들어오는 파도가 모래 더미를 덮쳐, 각별의 신발과 양말이 완전히 젖은 꼴이 되었다. 싸늘한 침묵이 주위를 감돌았다. 공룡이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는 듯 데구르르 눈을 굴렸다. 정공룡 조진다. 손등에 핏줄을 세운 각별이 공룡의 멱살을 잡고 짤짤 털어댔다. 저기요 항복! 항복!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룡의 외침은 각별에게 닿지 않았다.
"이거 얼마 전에 산 건데, 장난하냐?"
"...열심히 빨면 되지 않을까?"
"진심? 넌 그냥 죽어라."
"아니 잠깐만,"
순간, 공룡의 눈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각별이 순식간에 변한 분위기에 의문을 표하기도 전, 공룡이 각별을 뒤로 확 밀어냈다. ...너 뭐 하냐? 졸지에 영문도 모른 채 밀쳐진 각별이 욱신거리는 어깨를 주무르며 무너진 자세를 바로잡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어색한 상황에 갑작스레 끼어든 것은 파도가 다시 밀려나가며 모습이 드러난 모래 속에 반쯤 묻혀있던 깨진 유리병 하나였다.
"설마 저거 때문에 민거야? 내가 밟을까 봐?"
"......"
"신발도 신었는데 밟아도 얼마나 다친다고. 왜 과보호야?"
"...그, 혹시 모르잖아. 어디 잘못 찔렸다가 과다출혈로 죽는다거나 밟고 넘어져서 그대로 파도에 쓸려간다거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되도 않는 핑계를 대는 공룡을 각별이 수상쩍은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 보였기에, 각별은 따로 말을 덧붙이는 것을 그만두었다. 공룡이 멋쩍게 웃으며 유리병을 저 멀리로 차 냈다. 마치 그게 폭탄이라도 된다는 듯이.
공룡의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멈췄을 때는 언제였을까. 그리고 그것은 왜 멈췄을까?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공룡은 믿지도 않는 빌어먹을 신만이 그 답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은 각별의 죽음이었다. 건물 옥상에서 떨어진 화분에 맞아 즉사.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허무한 죽음. 공룡은 각별의 몸이 힘없이 쓰러지던 그때를 기억한다. 몇 번이고 그의 맥을 짚어보았던가. 그의 심장이 다시는 뛰지 않을 것이란 걸 받아들이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던가. 부정, 분노, 포기, 그리고 수긍. 결국 공룡이 각별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공룡은 당황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상황. 하지만 짧은 혼란 이후 공룡은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이면 어떠하고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불분명하면 어떠한가. 각별이 죽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공룡은 각별의 머리 위로 화분이 추락하기 전 그를 구해냈다. 그리고 안심하며 미소 지으려던 공룡의 앞에서 각별이 지나가던 차에 치여 허공에 몸을 띄웠다. 두 번째 루프의 실패였다.
그 후로는 수많은 루프가 공룡을 기다리고 있었다. 악보 위, 영원한 도돌이표 안을 맴도는 듯한 느낌. 공룡이 아무리 노력해도 각별은 어떤 식으로든 죽어나갔다. 빗물에 미끄러져서, 책상에 머리를 박아서,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죽음 앞에서 공룡은 수없이 절망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데? 이 루프는 언제 끝나게 되는 거지? 만약 영원히 끝이 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나 공룡은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무너져 내릴 수 없었다.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도저히 각별의 죽음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차라리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에 몸을 맡기는 것을 선택했다.
"아니 무슨 펜션이 산 골짜기에 있어? 정공룡, 너 제대로 알아본 거 맞냐?"
"저기가 그나마 제일 나은 숙소거든? 뭘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시네."
각별이 차가워진 땀을 닦아내며 캐리어를 언덕 위로 끌어올렸다. 길 진짜 뭐 같네. 무슨 제대로 된 길이 하나도 없어? 울퉁불퉁한 조약길과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벌레들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젖은 신발에 달라붙는 풀들을 각별이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며 말했다. 그래도 도로는 있잖아. 공룡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태도가 더 불만이었는지 각별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그래, 제대로 된 가로등 하나 없어 보이는 저 도로 말이지. 어차피 여기까지 올라올 차도 없는데 뭔 소용이야?"
"이제 다 왔으니까 좀 참아. 대신 그거 내가 들어줄게."
각별의 왼쪽 손에 들린 손가방이 쏙 빠져나갔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시선이 공룡을 향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더니...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뭐, 불만이야? 들어준데도 되게 뭐라하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기억. 눈앞의 괴생명체를 보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각별의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사인, 놓친 짐을 주우려 하다가 내리막길에서 미끄러져 발생한 뇌진탕. 공룡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다시 바라본 각별의 이마는 깨끗했다. 이제는 반사적인 행동이 되어버린 거짓 미소가 입가에 걸쳐졌다. 이제 가볍지? 그럼 빨리 올라와. 제 할 말만 하고 뒤를 도는 공룡을 각별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지만, 그는 펜션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슉- 펑!! 노란 빛깔의 폭죽이 어두운 밤하늘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수놓아진 별빛들의 사이로 자연스레 스며드는 폭죽을 보며 공룡이 휘파람을 불었다. 멋진데? 하나 더 없어? 딱 한 개 남았음. 각별이 마지막 폭죽에 불을 붙였다. 타들어가는 심지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하늘로 솟아오르는 붉은 광선이 퍽이나 아름다웠다. 펑! 네 번째이자 마지막인 폭죽이 그렇게 밤하늘의 별의 잔해가 되며 사라졌다.
"몇 개 더 사놓을걸.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폭죽을 터트려보겠어?"
"쓸데없는 물건 산다고 폭죽 사는 거 깜빡했잖아. 그나저나 존나 춥네. 이제 돌아가자."
"아 아쉬운데..."
입맛을 다신 공룡이 바지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펜션에서 먼 곳까지 걸어온 거라 빨리 가야 한다고. 어두워지면 앞도 안 보일걸. 각별이 앞장서서 공룡에게 손짓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를 잠깐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다고 어떻게 네게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공룡은 그저 입을 다물고 각별을 따라나서는 것을 택했다.
깜빡거리는 가로등의 불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끝에서부터 하나씩, 툭. 공룡과 각별은 빛이 사라져가는 도로 위를 걸었다. 여기 가로등 진짜 좀 고쳐야겠네. 어두워서 운전은 제대로 할 수 있나? 이 정도면 헤드라이트 켜도 안 보이겠다. 주절거리는 대화 소리가 메아리처럼 허공을 떠돌았다. 나무 사이를 맴도는 이야기 소리.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던 대화를 끊은 건 습기가 차 눅눅해진 공기와 하늘에서부터 추락하는 작은 물방울들이었다. 회색빛의 도로가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를 기점으로 검게 물들어갔다.
"비가 와."
"나도 눈 있어."
"...왜 비가 오지?"
"아까부터 날씨가 좀 흐렸잖아. 아, 우산 없는데."
각별이 이마에 떨어진 물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진짜 빨리 가야겠는데. 조금 있으면 쏟아지겠어. 공룡은 빠른 걸음으로 오르막을 오르는 각별의 모습을 그저 멍하니 쳐다봤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동공. 왜 그래? 의문 어린 각별의 물음에도 공룡은 침묵을 지켰다. 겨우 떼어진 입술이 내뱉은 건 수도 없이 말해왔던 아무것도 아니야, 였다.
100번의 루프 동안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비가 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근데 무슨 소리 들리지 않냐? 점점 커지는 거 같은데."
"소리?"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이자 저 멀리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공룡의 머릿속에 43번째 루프가 떠올랐다. 그때 각별의 사인은 타이어에 펑크가 나 미끄러지던 자동차에 치여 내장 파열. 그 사고가 있었던 자리는, 바로 이 근처였다. 공룡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원래는 없어야 할 비라는 변수와 경험한 적 있는 루트보다 조금 더 빠르게 진행되는 전개. 이건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 공룡은 단언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다시 오지 않아. 이건 굴레의 허점이었다.
우거진 숲의 옆으로 미약한 헤드라이트의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각별은 그를 보지 못하고 도로에 발을 디뎠다. 공룡의 몸이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로 뛰쳐나갔다. 각별의 어깨를 쥐어 잡고, 거세게 뒤로 밀어냈다. 이제 헤드라이트의 빛은 정확히 공룡을 향하고 있었다. 아, 더럽게 눈부시네. 눈을 감기 직전, 경적 소리와도 같은 이명 소리가 공룡의 귓가에서 비명을 질렀다.
끼이익- 쾅!!!
눈꺼풀이 끔찍하게 무거웠다. 등에 닿은 차가운 바닥이 점차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코 끝을 찌르는 피비린내. ---, ------! 누군가가 공룡의 몸을 붙잡고 소리쳤다. 시끄러워. 머리가 울리잖아. 눈을 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몸이 제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잦아드는 이명. 목소리의 주인을 구분할 수 있게 됐을 때쯤 공룡의 눈꺼풀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야! 정공룡!! 정신 차-"
뭐야, 김각별 맞잖아. 공룡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지옥 같은 루프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쿨럭- 목구멍에서 짙은 피가 솟아올랐다. 무감각해진 몸의 감각. 차가워지는 체온. 느려지는 심장 박동 소리가 공룡의 온몸에서 울려 퍼졌다. 죽음이 제게 다가오는 것을 느낀 공룡이 굳어버린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거 기분 나쁘네. 너는 이런 걸 몇 번이고 겪었다는 거겠지. 하여튼 지독하다니까... 각별의 손이 공룡의 손을 잡기 위해 내밀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한 어둠이 드리웠다.
툭- 공룡의 손이 아래로 추락했다. 그 손을 끝내 붙잡지 못한 각별이 벙찐 표정을 지으며 싸늘해진 공룡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덜덜 떨리는 손이 시체의 손목을 짚었다. 뛰지 않는 맥박. 명백한 죽음의 냄새. 각별은 생각했다. 어째서?
2021년 2월 3일.
오늘은 각별의 101번째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각별은 제 머리 위로 갈빛의 화분이 추락하던 때를 기억한다.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멈춰버린 제 심장도.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흐르지 않은 2월 3일의 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은 신뢰하지 않는 편인 각별은 이것이 그저 꿈이라고 생각했다. 가끔가다 한 번씩 꾸는, 그런 악몽. 하지만 같은 악몽이 7번째로 제 눈앞에 펼쳐졌을 때 결국 그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실제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인지 눈치가 빨라진 공룡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피해보려 한 횟수가 벌써 21번째. 각별은 죽음의 굴레를 향해 두 손을 들었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을 항상 긴장한 상태로 기다리는 것은 각별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죽음의 고통이 너무나도 역겨웠다. 각별은 47번째 졸업식을 함께하는 제 오랜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도 이 지옥의 주인공이 네가 아니라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공룡이 졸업장을 흔들며 각별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고 뻔뻔한 미소를 지어내는 것은 참으로 쉬웠다.
'혹시 무슨 일 있냐?'
그런 공룡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언젠가부터 공룡은 예전과 다르게 행동했다. 무언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한 행동들. 원래의 그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들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각별이 이상해진 것은 자신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많은 죽음을 겪어 예민해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구덩이 속에서 영원의 시간 동안 헤맨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는 진작에 포기했다. 그렇게 각별은 계속해서 추락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으며 함께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그날도 그저 그런 날이었다. 이전과 같은 여행, 같은 대화. 각별은 별다른 생각 없이 공룡과 함께 해변을 거닐었다. 파도에서 갑자기 돌덩이가 튀어나와 내게로 날아오려나. 아니면 뭘 잘못 밟고 넘어져 뒤통수가 깨지려나? 부정적인 생각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경험의 산물이었다. 짜여진 대본을 읽으며 무대 위를 맴돈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다. 요즘 정공룡 눈치 빨라졌던데. 표정 관리 제대로 하고 있겠지? 거울을 볼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도 공룡이 가끔씩 하는 이상한 행동들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반응이 없었기에, 각별은 안도했다. 평소와는 순서가 다른 폭죽들이 밤하늘을 뒤덮었다.
비가 내렸다. 100번의 2월 3일 동안 한 번도 내린 적이 없던 비가. 확실히 이건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하지만 각별은 비가 내리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사소한 변수에 신경을 쓰기에 그는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어차피 죽게 될 거, 비의 유무가 무슨 상관인가. 끽해야 자신의 101번째 죽음의 원인에 비라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될 가능성이 생긴 것뿐이라고, 그는 흘러가듯 생각했다. 각별은 초연하게 죽음을 기다렸다.
그가 기다린 것은 자신의 죽음이었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 피를 쏟아내고 있는 공룡의 모습은 결코 각별이 기다리던 것이 아니었다. 쨍그랑- 변하지 않던 죽음의 규칙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째서. 왜 너는 이런 짓을 한 거지? 공룡이 각별을 구하려 한 적은 많지만 각별을 대신해 제 목숨을 내던진 적은 없었다. 공룡이 죽는다는 만약의 경우 따위 각별의 가정 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때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왜 공룡은 웃고 있는 것일까. 갑작스레 닥쳐온 죽음 앞에서 왜 너는 후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나조차도 죽음을 맞이하며 웃은 적이 없는데, 어째서 너는...
수많은 기억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부터 변한 그의 행동. 자신을 향한 과보호. 가끔씩 허공을 향하던 텅 빈 눈동자. 그저 우연이라, 착각이라 치부하며 넘겨버렸던 어긋난 순간들. 각별은 절망했다. 우리는 비틀린 길을 돌이킬 수 없이 오랜 시간 동안 걸어왔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토록 증오했던 루프가 간절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한 번 정도는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되돌려줄 수 있잖아.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늘 해오던걸 한 번만 더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건데.
멈춰있던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각별의 간절한 소원과는 반대로 시간은 잔인하게도 흘러갔다. 그는 한참을 비를 맞으며 그곳에 서있었다. 비가 그치고 달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미치도록 원하며 또한 처절하게 피하고 싶었던 2월 4일이 찾아올 때까지.
Written by. 와구
Drawn by. 청금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