青春을 겪고있는,
스무 살, 여름 방학을 맞아 바다로 여행을 온 박잠뜰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앞에 보이는 바다를 빤히 쳐다봤다. 앞에 보이는 바다는 맑았다. 마치 자신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햇빛을 따라 파도를 일으키고, 빠지고를 반복했다. 그러나 캐리어 하나에 지갑 하나를 들고 온 자신에게 남는 건 무거운 짐뿐이었다. 바다까지 갈 기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리조트는 여기에서 10분은 족히 걸어야 나오는 곳. 박잠뜰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진짜 귀찮네. 택시 부르고 싶다…. 그러나, 걸어서 10분 거리인 리조트에 택시를 타고 가기엔 너무 돈이 아까웠던 자본주의 박잠뜰은 게으름을 이기고 걸어서 가는 것을 택하였다. 가는 길이 평지라는 것에 그나마 감사해 하는 박잠뜰이었다.
리조트에서 키를 받아 방으로 올라간 박잠뜰이 1215라고 적힌 문을 열었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푸르른 곳이었다. 방은 그 컨셉을 맞추려고 했는지, 푸르게 꾸며져 있었다. 파란색의 침대, 하늘색 화분, 그리고 파란 조명틀까지. 눈에 보이는 것들 중 초록색의 잎을 제외하고선 온통 파란색이었다. 탁자나 커튼, 이불 색은 하얗게 물들어서 그 색을 맞추려는 듯 보였다. 물론 잠뜰은 이런 방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지. 침대가 두 개인 2인실을 빌려서인지 잠뜰이 혼자 사용하기엔 꽤 컸다. 물에 물건을 빠트리듯, 침대에 캐리어를 던진 박잠뜰이 다른 한 침대에 자신을 던졌다. 피곤해서인지, 이불이 포근해서인지 이불이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는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렇지만 박잠뜰이 지키지도 못할 거면서 세워둔 계획은 많았기에, 순식간에 노곤해진 몸을 일으켜 캐리어에서 대강 사용할 것들만 빼놓고선 집에서 챙겨온 천 가방을 챙기곤 다시 걸음을 밖으로 향했다. 할 일이 많았다.
1층 마트, 박잠뜰은 즉석식품 칸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햇반 몇 개를 담곤 대충 이리저리 움직여 달걀과 작은 기름을 골랐다. 집에서 가져온 간장, 참기름과 같이 먹으면 그 무엇보다 맛있을 달걀을 바구니에 담자마자 박잠뜰 머릿속에선 이미 간장달걀밥이 완성되었는지 달걀 냄새가 코를 맴도는 듯 보였다. 의도치 않은 웃음이 박잠뜰의 입에 앉았다. 다음으론 여행을 하며 먹을 과자와 음료수였다. 초코파이 몇 개와 습관적으로 과제 친구인 에너지바를 바구니에 담은 잠뜰이 음료수 칸을 보며 고민했다. 커피는 싫어하니 패스, 이온음료도 그다지 좋아하질 않으니 패스. 카페인은 여기서 먹기엔 좀 그러니 패스. 결국은 무난하게 사과 주스를 고른 잠뜰이 계산하고선 미리 가져온 봉투에 넣곤 다시 방에 들어가 냉장고에 하나씩 넣는다. 다 넣은 박잠뜰이 기지개를 한 번 피고선 리조트 밖으로 나왔다. 에너지바 하나와 지갑 하나 들고나온 것치곤 계획이 많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 바다 한 번 쳐다보고선 힘차게 한 발을 내디뎠다. 날씨가 푸르른 것이 첫 시작부터 느낌이 꽤나 좋았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 형식적이면서도 깔끔한 카페 로고에 잠뜰은 몇 초간 멍하니 쳐다보더니 바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라며 카페를 울리는 직원의 소리에 바로 다가가 말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아메리카노 한 잔씩 주세요. 결제를 하고, 진동벨을 받더니 익숙하게 2층 테라스로 한 발, 두 발 올라가 전망이 좋은 곳에 앉았다. 잠뜰의 눈에 옆에 놓인 꽃이 보였다. 빨갛고, 또 빨간색들이 잠뜰의 눈을 사로잡는다. 잠뜰의 눈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이 꽃에 집중된다. 지이잉, 갑자기 울린 진동벨에 겨우 꽃에서 눈을 뗀 잠뜰이 진동벨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간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받은 잠뜰이 아 참, 하고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있잖아요.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혹시 2층에 놓인 꽃이 무슨 꽃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 그 꽃이라면,
아마 백일홍일 거에요. 말을 들은 잠뜰이 다시 한 번 2층에 가서 앉았다. 앞에 놓인 아무도 없는 의자를 또 멍하니 쳐다보다가, 아메리카노를 그 앞에 놓는다. 제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는 먹을 생각도 없는지 백일홍을 쳐다보고, 또 바다를 쳐다보던 잠뜰이 그렇게 한 시간을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눈길을 자연스레 다 녹아 밍밍해진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옮긴다. 몇 분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제 앞에 있던 아메리카노는 왼손에, 아무도 없는 자리에 놓았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오른손에 들곤 1층으로 내려갔다. 잘 있었어요. 라며 잠뜰이 직원에게 여름임에도 꽤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건넨다. 더우시겠지만, 많이 식었으니 목마르시면 한 모금씩 마시세요. 저는 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면 충분해요. 직원이 멀뚱히 바라보더니 이내 눈동자를 크게 만든다.
혹시 손님, 설마…. 그때,
잠뜰이 직원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웃는다. 꽤 오랜만이죠? 벌써 이 년이나 지나서 추억 여행이나 하러 왔거든요. 그 말에 직원이 아, 짧은 감탄사 내뱉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즐겁게 여행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직원에게 방긋 웃어 보이곤 카페 앞으로 나온 박잠뜰이 밍밍해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셨다. 눈살이 티도 안 날 만큼 조금 찌푸려진다. 아, 쓰다.
잠뜰이 카페 앞으로 나오자, 아까 그 정류장이 잠뜰의 시선에 잡혔다. 그러곤 다시 한 번 카페를 바라보았다. 횡단보도 하나 사이에 놓인 두 개의 건축물을 멍하니 바라보던 잠뜰은 횡단보도를 건너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고, 또 푸른 하루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오히려 잠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싫었는지, 잠뜰은 시선을 바다로 옮겼다. 양옆을 보며,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을 지나, 정류장을 딛고 넘어간 잠뜰의 눈에 보이는 것은 끝없는 모래사장과 바다였다. 잠뜰은 아무도 없는 시원한 바닷가를 계속 쳐다봤다.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던지곤, 바다로 한 걸음씩 향했다. 따끔거리는 조개 조각들은 알 바가 아니었다. 앞으로 갈 때마다 바다가 환영한다며 더욱 크게 파도친다. 젖은 모래들에 다가갔을 때엔, 조개 조각들이 파도를 맞아 조금 동글동글한 모양이었는지 하나도 따갑지 않았다. 결코 박잠뜰은 이 바다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지만, 결국 못 참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빠르게 바다를 향해 걷자 어느새 무릎까지 물이 찼다. 차가운 여름의 바다가 하늘에서 오는 열기를 없애주는 것 같았다. 그대로 몇 분을 물 속에 있었을까, 제 발을 간질이는 모래들을 쳐다보던 잠뜰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빨간 배 몇 척이 지나가고 있었다. 빨간 배 몇 척과 바닷속의 자신이 그 무엇보다 평화롭다고 생각해서, 잠뜰은 그대로 몇 분간 보기만 했다. 그러다 조금 추워졌는지, 바다에서 나와 배가 몰려있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젖은 발은 그대로 맨발인 채로 걸었다. 모래의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잠뜰에게 전해졌다. 아까 벗어 던졌던 신발을 손에 잡고, 아메리카노를 손에 꼭 쥔 채로 모래사장 한가운데를 잠뜰이 가로지르듯 뛰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이, 그 무엇보다 시원한 미소로. 그렇게 하염없이 뛰던 잠뜰이 선착장에 도착했다. 오돌토돌한 시멘트가 발을 간질였다. 그제야 거칠어진 숨을 조금 고르곤 천천히 걸으면서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휴대폰에서 연락처를 켰다. 누군가의 이름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몇 번 톡톡 치더니 다시 주머니 안에 넣어뒀다. 선착장의 끝 부분에 와서는 선착장 끝 부분에 걸터앉았다. 바람이 참 시원했다. 그 바람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옆에 두곤 바다를 감상했다. 푸른 바다가 참 예쁘다고 생각할 즈음 바다가 차차 검게 물들어졌다. 무엇 때문인가 싶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심상치 않은 날씨에 잠뜰의 표정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얘는 정말 언제 오는 거야, 사람 기다리다가 죽겠네. 하늘이 새까맣게 물들고 푸른 바다가 하늘을 머금음과 동시에 검은빛을 머금었다. 소설의 2장이 막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잠뜰이 또다시, 밍밍해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신다. 너는 이걸 도대체 어떻게 좋아했던 걸까? 라더야. 반 즈음 줄어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잠뜰의 손 움직임에 맞춰 잔잔히 흔들린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을 부르듯 부드럽게 쳤던 파도가 이젠 자신을 삼킬 것 같이 강하게 치기 시작했다. 라더야, 너는 왜 오질 않는 거야. 너 때문에 2인실 예약했는데. 그것도 바다가 잘 보이는 곳으로. 박잠뜰이 먹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을 눈에 가득 담다가. 이내 눈을 감는다. 아, 혼자 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냥, 너 없으니까 오지 말걸 그랬나봐. 쓸쓸히 말을 내뱉던 박잠뜰이,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덤덤하게, 또 조금의 답답함을 섞으며 잠뜰이 말하자 하늘이 그걸 들으면서 자신도 슬퍼졌는지 번개를 내렸다. 잔잔하고 크게 울리는 번개가 지상을 감쌌다.
…… 네게 '쉼표'가 필요했던 거라면,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진짜. 아무도 없는 선착장에서 잠뜰이 계속해서 말을 뱉기 시작한다. 아무도 못 듣고, 아무도 듣지 않을 홀로 있는 그 공간에서의 박잠뜰은 울부짖지 않았다. 오히려 덤덤하게 자신의 말을 호소하는 듯 누군가에게 전했다.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을 누군가에게. 잠뜰이 눈을 감곤 여행을 와서 봤던 모든 빨간색을 생각하고, 또 기억한다. 아까 봤던 백일홍은, 유독 너를 떠오르게 했다. 그래서인지 몇 시간이 지나도 그 꽃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빨간색 꽃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그 꽃이 없음에도 잡듯이 손을 뻗는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꽃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이러다가 저 보이지도 않는 꽃을 잡으려다 물속에 영원히 빠지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한 박잠뜰이 물기가 사라진 발에 신발을 욱여넣곤 다시 모래사장을 향해 걷는다. 달릴 힘은 남아있지 않았고, 그렇다고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거칠어진 바람이 머리카락과 옷 사이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한다. 언젠가 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입 밖까지 나올뻔한 말이 몸속 끝까지 들어간다. 차가운 바람 덕에 보이고 싶지 않았던 조그마한 물방울 하나가 눈가에서 말라버렸다. 씁쓸한 웃음은 입 밖에서 자유로이 맴돌고 눈가엔 습기가 차올랐다. 한참을 걷다가 자신이 모래사장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박잠뜰이 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봤다. 파도가 자신을 삼킬 것처럼 크게 친다. 환영의 의미가 아닌, 부디 나가주라고 파도친다. 잠뜰이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런지는 자신만 알겠지만 파도는 정말 잠뜰이 그렇게 느낄 정도로 크게 쳤다. 잠뜰이 한동안 멍하니 바다만 쳐다보다가, 모래사장 한가운데에 풀썩 주저앉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것이 불안감에 젖은 선택인지, 아니면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고요한 대지 위에서 바람과 파도가 장난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하늘이 까맣고, 바다가 검게 물든 것 같은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검게 물든 물과 구름 위에 파란색의 색종이를 덧붙인다. 물에 젖고, 또 구름이 그를 밀어내지만 몇 겹을 계속하여 붙여버린다. 그러나 거친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색종이에 박잠뜰이 눈을 뜬다. 그치, 이게 현실이지. 오후 2시임에도 불구하고 까만 하늘이 박잠뜰을 반겨준다. 아까와 똑같은 풍경이었지만 감고 있던 눈에서 보이던 짙은 검은색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입안으로 삼킨다. 조금 차분해지는 분위기에, 잠뜰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신다.
누나.
아, 네 목소리가 또 들린다.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좀 차분해지기 시작해서야 들리기 시작한다. 전파를 통해 들려오는 것처럼, 귓가에 맴돌듯이 들려오는 네 목소리에 대답이 나오질 않는다. 입안에서 응어리가 맺힌 듯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서 그저 답답함만을 표정으로라도 표출해낸다. 라더야, 도대체 어디야. 잠뜰이 속으로 말을 내뱉다가, 세상에 울리는 전파소리에 번뜩 얼굴을 든다.
누나 내가 미안하다고. 낮잠 자서 미안하다고….
… 내가 너랑 전화하고 있었니?
모르는 척하지 말고…. 아니 미안하다니까….
미안하다고? 너 지금 4시간 늦어놓고 뭐?
아니…. 아냐, 아니 누나. 그게 아니고,
됐어. 나 혼자 놀고 오련다, 진짜!
아니, 뜰누나. 뜰누나……. 그렇다고 두고 가는 게 어디 있냐고…. 나 죽은 것 같이 말하는 건 또 뭐냐고…. 그 말에 잠뜰이 말을 푸핫, 하고 내뱉는다. 그러면 니가 빨리 오던가, 이리 늦어서야 진짜. 검은색을 띠던 하늘이, 색종이가 떨어지듯 한순간 맑은 파란색으로 바뀐다. 그에 따라 하늘의 빛을 머금던 바다가 종이를 떼듯, 갑작스레 맑고 투명한색으로 변한다. 야 라더야, 너 그래서 어디라고? 엉, 나 이제 여기 앞이야 누나! 그 말에 잠뜰이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세워 앞으로 나아간다. 파도가 잔잔히 잠뜰을 반기며 있지도 않은 열기를 없애준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시원함이었다. 누나, 나 아아메 하나만 사주라. 너 양심 나갔니? 아녑. 그 말에 잠뜰이 쿡쿡 웃는다. 네가 사와, 나는 민초 프라페. 그 말에 서라더가 알겠다며 말했다. 핸드폰으로 전해지는 덜컹거리는 버스의 소리와 제 앞에서 울리는 파도 소리가 서로 부딪히면서도, 파도가 버스를 부드럽게 감싸는 듯 시끄러운 소리가 아닌 오히려 따뜻한 소리가 들린다.
누나, 그래서 우리 방 침대 두 개에 다 누나 짐만 놓은 건 아니지?
……
… 누나?
아하하. 잠뜰이 어색한 웃음을 몇 번 내뱉는다. 라더의 침대에 짐을 놓았던 것을 떠올린 잠뜰이 차마 말을 내뱉진 못했다. 미안하다 라더야. 밍밍해진 아메리카노와 함께 말을 삼켰다. 아까완 달리 은은한 미소가 잠뜰의 입가를 맴돈다. 아, 쓰네.
서라더트위치존버 팀
Written by. 하청
Drawn by.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