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울렸다.
손에 대롱대며 매달린 가방들이 걸음을 퍽 위태롭게 만들었으나, 다행히도 가방의 수가 많은 것 치고는 시야에 지장은 없어 리스크는 위태로운 몇 걸음으로 끝낼 수 있었다. 짐은 지들이 옮길 것이지. 왜 선배를 시켜? 라 물으면 괜히 ‘오는 길에’라는 편리한 네 글자에 홀랑 속아 응한 게 제 잘못이라면 잘못이어서, 일단 각별은 약간의 억울함을 감수한 채 조용히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며 숨을 골랐다. 운동화 굽이 반질대는 타일에 맞부딪혀 타각거렸다. 각별이 그리 한참을 걷다 멈추어 서서, 이내 느릿하게 숨을 들이쉬고는 발로 교실 문을 밀었다.
“일 끝냄.”
“오, 등장 한 번 화려한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우르르 떨어지는 가방을 바라보며 공룡이 감상을 내놓았다. 소리에 고개를 쑥 내민 덕개가 잠뜰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누나, 가방 왔어요. 각별이 손에 대롱 매달린 마지막 가방 하나를 마저 바닥에 떨구며 대꾸했다. 넌 나보다 가방이 먼저냐, 덕개야?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덕개가 반듯한 자세로 재빠르게 해명했다.
“확실히 형보다는 지금 가방이 더 중요하긴 하지.”
“수현이는 평소 나한테 뭔 불만이 있었던 걸까?”
괜한 의미부여 하지 마. 이 양의 짐을 다 손으로 들고 갈 수는 없고, 형도…… 수현이 어중간한 미소를 지어내며 말을 흘렸다. 이 자식 좀 봐라. 자연스레 넘어가려는 대화 주제에 각별이 슬 눈을 흘겼다. 수현이 그 눈빛을 무시하며 손뼉을 짝 치고는 말을 이었다. 라더가 뭐 줄 거 있다고 했는데. 뭐, 내가? 각별이 들고 온 가방 속으로 짐을 밀어 넣던 라더가 갑작스러운 불림에 고개를 들며 반문했다. 나 가지고 있는 거 없는데. 아니, 아까 각별형 오기 전에 있잖아. 그게 뭔데. 가방의 상태를 살피던 잠뜰이 흘러가듯 답을 내놓았다.
“넥타이 있잖아.”
“아, 맞다.”
갑자기 뭔 넥타이. 각별이 반 즈음 열린 교실 문을 닫으며 물었다. 뭐긴 뭐야, 선물이지. 수현이 교실 안을 훑으며 그리 답했다. 라더가 그제야 수현이 무얼 가리켰나 깨달았다는 듯 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각별에게 돌돌 말린 노란 넥타이 하나를 내밀었다. 너네는 왜 그렇게 까먹는 게 많냐. 잠뜰의 핀잔은 덤으로.
이게 뭔데. 우리 학교 넥타이지. 각별이 튀는 색의 넥타이를 받아 들었다. 돌돌 말려 있던 것이 그에 손에 떨어지자마자 풀리며 본모습을 되찾았다. 이유는 몰라도 오랜만에 닿는 천의 감촉이 영 어색해서, 한참 그것을 만지작댄 후에야 의문점이 떠올랐다.
근데 이걸 왜 주는데. 너 나랑 지금 스무고개 하냐? 그리고 그것을 입 밖으로 내었다. 넥타이 선물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학교 넥타이 선물이라면 확실히 뜬금없기는 했다. 그 말을 들은 라더가 대답을 찾는 듯 잠시 고민하더니,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턱을 문지르다, 눈을 감고는 뭔가 이 넥타이 하나에 지대한 뜻을 숨긴 마냥 쓸데없는 자세를 취하더니…… 생각보다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졸업 선물이래요. 왜 떠올리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간단한 대답이었다.
“근데 뭔 졸업 선물을 넥타이로 줘. 더 제대로 된 건 없어?”
“야, 봐. 내가 저렇게 말할 거라고 했지.”
“속 편한 소리는. 넥타이 선물은 너만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야.”
잠뜰이 소리 없이 웃고는 손에 들린 푸른색 넥타이를 흔들며 말했다. 내가 파란색 넥타이를 하고 다닐 일이 어디 있겠냐? 뭐야, 고맙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걸 믿니, 덕개야? 그거 각자 색으로 우리가 열심히 맞춘 건데……. 공룡이 우는 소리를 내며 눈가를 훑어내면 잠뜰이 질린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가 제일 구리다고 했던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공룡은 또 뭔 소릴 한 거야? 아이디어 제공자로 추정되는 덕개를 가볍게 무시하며 잠뜰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진짜 선물은 여행 쪽이야. 그건 내가 전에 여기서 말도 했었는데.”
“그게 오늘인 걸 아니까 내가 직접 가방을 들고 왔겠지.”
“그럼 얘기 끝난 거 아냐. 뭘 더 기대한 거야?”
“아니, 너희들은 학교 안 가?”
가장 당연한 건 안중에도 없냐. 일주일 여행으로 딱 끝나는 게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얘가 쓰던 계획서 보면. 각별이 그리 말하며 잠뜰을 검지로 툭 건드렸다.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잠뜰이 그의 손을 쳐냈다. 그건 또 언제 본 거야? 예전에. 잠뜰이 조용히 눈을 흘겼다. 그래서 어쩔 건데. 아래서부터 날아오는 17기 졸업생 2의 시선을 무시하며 각별이 아직 재학생인 2학년 셋과 1학년 하나에게 물었다. 공룡이 고민 한 점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째자.”
“너 미쳤니?”
각별이 반사적으로 받아쳤다. 나도 못 해 본 무단결석을 너희가 해?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지적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 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토로’ 같은 지적에 덕개가 속으로 생각했다. 아, 우리 중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놈이 범생이인 척은……. 공룡이 뒷머리를 매만지며 각별의 어깨에 팔을 기댔다.
“그러면 미리 말하던가. 이미 짐 다 싸 놓고 이제 와서 뭔 딴소리래?”
“그렇긴 하지.”
라더가 수긍하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이 대화에 오르며 말을 이었다.
“일단 가기로 했고 싫다는 사람도 없으니까 가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아. 잘못 말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 그리고… 우리 이런 얘기할 시간이나 있어?”
그렇게 말을 끝내며 수현이 가방을 집어 들었다. 토 달지 말고 각별형은 빨리 가방이나 싸. 품 안에 낡은 가방 한 개가 안겼다. 각별은 잠시 영문 모를 얼굴을 하더니, 이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제 12기, 졸업을 축하합니다!' 대문짝만 하게 걸린 현수막이 후문에서 보란 듯이 펄럭였다. 단조로운 디자인이었지만 역시 크기는 부정할 수 없어서, 이미 후문에서부터는 꽤 벗어났음에도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퍽 요란해 보였다. 해가 진 밤임에도 불구하고 교문 안은 여전히 붐볐다. 몇 달 전의 복도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귀 옆에서 울리는 듯했다. 각별이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미디어로는 수십 번을 접한 졸업이지만, 직접 겪게 되니 감회가 달랐다. 뺨에 닿는 바람이 서늘함이 묻어 있었다. 손을 천천히 흔들며 목적지 희미한 인사를 건네고는 그가 고개를 돌렸다.
풀을 밟는 서벅대는 소리 몇 개와 함께 푸른 땅이 바람에 흔들렸다. 각별이 숨을 들이쉬면 찬 공기가 천천히 속을 메웠다. 맨 가방의 묵직함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청명한 바람에 흑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진짜 평화롭네. 흐트러진 머리를 넘기며 그가 생각했다. 시선을 내리면 선명한 녹색의 풀밭과 그 아래 갈색 흙이 드문드문하게 모습을 보였다.
“여, 거기. 감상에 젖지 말고.”
잠뜰이 픽 웃으며 뒤처지지 말라는 듯 손짓했다. 멀어진 거리가 묵직한 뜀박질 몇 번으로 좁혀졌다. 각별이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감상에 젖긴 누가. 오히려 고등학교 추억에 녹아서 속으로 눈물 짜는 건 너 아니야?”
“웃기시네. 멀쩡히 잘 걷던 쪽과 하염없이 학교나 바라보던 쪽 중 누가 더 추억에 젖었을까?”
애들은 벌써 저만치야. 그 말에 이어 잠뜰의 발에 속도가 붙었다. …지금 우리 경주 하나? 각별이 의아한 표정을 내짓더니 이어 빠른 걸음으로 그를 뒤따랐다. 옅은 발자국이 풀밭에 남았다. 갑자기 시작된 경주 아닌 경주에 불이 붙어, 뒤따르는 각별을 흘깃 바라본 잠뜰이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몇 발짝 더. 목표 지점에 가만히 서 있던 수현의 등을 툭 건드렸다.
“넵, 세이프!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왜 이렇게 늦어? 거북이인 줄 알았네.”
“아니, 왜 나도 거북이야? 저기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쫓아오고 있는 사람한테나 말하지.”
“누가 거북이라고?”
각별이 잠뜰의 어깨를 턱 붙잡았다.
“수현아, 그래서 뭐 하고 있었다고?”
“와, 주제 전환 진짜…….”
수현이 다른 의미로 감탄하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라더랑, 공룡이랑, 덕개랑. 졸업생 둘이 하도 안 오길래 하늘이나 보고 있었지. 그 말에 두 사람이 따라 고개를 들었다. 검은 하늘에 총총하게 박힌 별이 반짝였다. 오… 각별이 중얼거렸다.
“장관이구만.”
“그렇지?”
하며 수현은 조용히 대답했다. 바람이 여섯의 사이를 간질이며 날았다. 각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장관이구만.”
“그렇지?”
둘의 대화가 밤하늘 사이로 울렸다. 잠뜰은 검은색의 하늘을 가만히 올려보고 있다가, 이내 슬그머니 눈을 내렸다. 좀 쉬려는 듯 그나마 깨끗한 자리를 찾아 드러누운 공룡과 덕개가 눈에 띄었다 라더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가만히 손에 쥐면 바스러지는 마른풀을 쥐고 있었다. 버석거리는 수분기 없는 소리가 발밑에서 울렸다.
그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말라비틀어진 풀들이 구원을 바라듯 죽어간 모습은… 뭐랄까. 식물의 시체 더미를 보고 있는 듯했다. 기분 진짜 이상해. 잠뜰이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본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사방에 깔린 것이 매캐하고 축축한 공기였지만 풀은 이상할 정도로 바삭거렸다. 졸업식 치고는 환경이 영 아니네. 그래, 졸업식.
이 지경이 된 지 얼마나 지났더라. 교실 속 그 작은 창에서 종말을 보게 된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기억도 희미했다. 달랑 여섯밖에 남지 않은 학교와 눈에 담기는 바싹 마른 풍경이 익숙하다고 느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른 탓이다.
고등학교 3학년으로의 1년을 끝내고 본래 일정대로 졸업식을 맞은 듯이 꿈에 젖은 저 멍청이의-잠뜰은 그 생각을 하며 슬그머니 각별을 바라보았다- 망상이 정말 현실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푸른 풀밭. 신기하다. 너에게는 그렇게 보여? 물을 생각은 차마 품지도 못했다. 일단 자신은 아픈 꿈에 젖은 친구한테 뼈저린 현실을 깨워주기엔 마음이 좀 약했다. 저 애들은 두말할 것 없고.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가방 속에 식량은 제대로 들어 있겠지. 우리 여섯만 남아 있는 게 아닐지도 몰라. 잠뜰이 생각했다. 차라리 나도 꿈을 봤으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끄는 건 제 몫이다. 각별이 멀쩡하다고 했을 지라도 그 역할은 저가 맡을 심산이었다. 그러니까, 억울해도 어쩔 수 없지. 나까지 포기하면 애들은 뭔 잘못이라고… 일단은 그렇게 될 대로 살아갈 작정이었다. 푸념은 그것으로 끝낸 잠뜰이 푹 숙이고 있던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각별이 가만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꿈에 잠긴 노란 눈과 눈이 마주쳤다. 저 노란색은 아직도 여전하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러 생각이 스쳤다.
Written by. 영
Drawn by. 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