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F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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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유년기의 청춘.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다시 추억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 졸업 축하해. "
" 어차피 볼 거면서. 안 볼 것처럼 구는 이유가 뭐야? "
" 학교는 떠나잖아. "

수현이 잠뜰에게 웃으며 꽃을 건넸다. 무지개색 안개꽃이 담긴 꽃다발이 잠뜰의 품에 안겼다. 향기 좋다. 나머지는? 수현이 강당 밖 운동장을 가리켰다. 농구 한대. 잠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부른다. 나 가볼게. 응. 나 뒤에 있을게. 꽃은 이리 줘. 스피커로 크게 들려오는 전교 회장, 부회장을 찾는 소리에 잠뜰은 급하게 강당 앞 무대로 갔다. 꽃을 다시 받은 수현은 꽃에 코를 박았다. 별 냄새 없는데... 좋은가? 꽃을 손에 쥐고 강당 밖으로 나온 수현이 운동장으로 향했다. 애들이 어딨으려나.

" 공룡아! 라더야! 덕개야! 곧 시작하는데 안 올 거야? "
" 엉, 가! "

농구공을 안고 있던 덕개가 급하게 농구공을 놓고 손을 털며 벤치에 올려둔 장미꽃다발을 쥐고 수현 쪽으로 달려왔다. 뒤이어 공룡과 라더가 라일락 여러 송이가 가득 담긴 꽃다발을 들고 따라왔다. 라일락이네? 응. 공룡이 꽃다발을 마구 흔들었다. 아~, 향기 개 좋아! 라일락 꽃향기가 넓게 퍼졌다. 꽃 다 떨어지겠다. 라더가 공룡의 팔을 잡고 막았다. 아, 역겹다. 수현은 메스꺼운 속을 손으로 꼭 쥐었다. 공룡이 수현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꽃을 쥔 손으로. 라일락이 수현의 바로 눈앞에 있었다. 수현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라더가 뒤를 돌아보자 수현은 웃었다. 늦겠다. 강당 가자.

정신없는 강당은 3학년들과 학부모들로 가득했다. 수현, 라더, 공룡과 덕개가 강당 뒤에 서서 무대를 바라봤다. 내년엔 덕개 혼자 학교에 남겠네. 공룡이 쿡쿡 웃으며 덕개를 놀렸다. 어차피 와줄 거잖아요. 덕개가 신코로 윤이 나는 바닥을 툭툭 쳤다. 공룡이 어깨를 으쓱였다. 건 모르지. 덕개는 피, 소리를 내며 툴툴거렸다. 인성...

' 아, 아. 잠시 후 제 18회, 푸르고등학교의 졸업식을 시작할 예정이오니 3학년 학생들은 각 반에 맞게 비치된 의자에 착석해주시길 바랍니다. 학부모 분들은 강당의 뒤편에서 기다려주시고, 사진은 졸업식이 모두 끝난 후에 촬영해주시길 바랍니다. '

각별, 잠뜰이 포함된 3학년의 졸업식이 막을 올렸다. 북적한 강당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수현은 괜히 머쓱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손에 달린 안개꽃이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후드득, 떨어졌다. 졸업식은 꽤 단조로웠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국기에 경례, 애국가 1절 제창, 다시 착석 후 교장 선생님의 말씀. 덕개는 벽에 기대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라더는 연신 고개 인사를 해댔다. 옆에서 공룡이 라더의 머리를 본인의 어깨 위로 옮겼다. 수현은 공룡에게 손을 내밀었다. 꽃 줘. 불편해 보인다. 엉? 아, 여기. 고맙다. 뭘, 별것도 아닌데. 수현의 양손엔 꽃다발이 가득했다. 안개꽃과 라일락의 향기는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로 진했다. 머리가 울리네. 수현은 애써 웃어 보였다.

' 이어서, 전 전교 회장, 부회장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

각별과 잠뜰이 나란히 강당 위로 올라갔다. 라더야, 일어나 봐. 너 저기 올라가야 돼. 공룡이 급하게 라더를 깨웠다. 부스스한 머리로 눈을 뜬 라더는 어기적거리며 강당 앞으로 나갔다. 수현이 옆에 있던 공룡을 불렀다. 저것도 찍어두자. 공룡이 킬킬대며 휴대폰 카메라를 켜 줌인을 했다. 화면 속에는 가지런한 동복을 입고 있는 각별, 잠뜰, 라더가 있었다. 찰칵, 플래시와 소리 없이 찍힌 사진은 흔들림 없이 선명하게 잘 찍혔다. 수현이 사진을 보고 웃었다. 응, 잘 나왔네. 단톡방에 보낼게. 띠롱, 휴대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형 알람 왔다. 수현이 급하게 휴대폰을 껐다. 스팸 문자야. 꺼진 휴대폰은 주머니에서 다시 켜져 급하게 울렸다. 031-835-****, 푸른백병원.

     [ 수현아. 왜 전화 안 받아. ] 누나 13:20
     [ 바빠?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와. ] 누나 13:20

" 공룡아, 일어나. 왜 자. 졸업식 끝났어. "
" 아... 교장 선생님 말씀하신 뒤로 기억이 없다. 벌써 끝났어? 아쉽네, 꽃 주러 가자. "

수현이 덕개와 공룡을 데리고 강당 앞으로 나갔다. 끝난 졸업식 덕에 붐비는 강당은 정신없었다. 사람들 틈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던 여린 라일락 꽃다발 속 라일락 몇 송이가 결국 꺾였다. 수현은 라일락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역한 냄새에 잠깐 휘청였던 수현이 다시 꽃다발을 꽉 안았다. 또 꺾일라. 각별이 꽃을 받고 구시렁거릴 게 뻔히 보여 수현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삼켰다.

" 누나. 꽃 여기. "
" 응~ 수현이는 아까 줬던 거고 덕개는 장미네? 고마워. "
" 형도 받아. "
" 내 꽃은 왜 이렇게 너덜거려? "

미안. 중간에 오다가 부딪혀서 꺾였어. 수현이 미안한 얼굴로 웃어 보이자 각별은 그러려니 하며 넘겼다. 잠뜰이 웃으며 카드를 꺼내 흔들었다. 우리 졸업식이기도 하고, 오늘 수현이 생일이니까. 내가 쏜다! 안개꽃다발과 장미꽃다발을 품에 꽉 안은 잠뜰이 먼저 강당을 나갔다. 그런 잠뜰을 따라 공룡이 부리나케 뛰쳐나갔고 각별과 라더가 터벅터벅 조용히 강당을 빠져나갔다. 수현은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다 주머니에 집어넣고 강당을 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 안 가봐도 되겠어? "
" 어? "
" 안 가도 괜찮은 거냐고. "

수현의 뒤에 있던 덕개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수현은 덕개를 보며 활짝 웃었다. 분위기 잡지 마. 덕개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언제 잡았다고. 수현이 덕개에게 가 어깨동무를 했다. 내가 알아서 타이밍 보고 빠질게. 넌 그냥 놀아. 덕개가 수현을 빤히 바라보다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수현이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 우리 맨날 가던 곳 갈 거지? "
" 그래야지. "

잠뜰의 질문에 공룡이 답했다. 좁은 길 탓에 둘씩 나누어 걸었다. 맨 뒤에서 따라가던 라더가 나지막이 덕개에게 물었다. 수현이, 무슨 일 있어? 덕개가 뜸을 들였다. 제가 말하는 것보다는 본인이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겠죠. 라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맴돌았다. 좁은 길에서 벗어난 여섯 명은 늘 가던 가게로 계속 걸었다. 정적을 견디다 못해 공룡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제일 늦게 도착한 사람이 쏘는 걸로 한다! 선두로 공룡이 먼저 뛰었다. 나머지는 벙쪄있다 서로를 보며 빵 터진 채로 공룡의 뒤를 따랐다.

가게에 제일 먼저 도착한 공룡이 방을 잡았다. 여섯 명이 항상 사용하던 6번 방에 들어간 공룡이 구석에 찢긴 폴라로이드 사진을 발견했다. 원래 여기 사용하는 사람 많이 없는데... 누가 들어왔다 찢어졌나? 나갈 때 다시 찍자고 해야겠다. 찢어진 폴라로이드를 주머니에 넣은 공룡이 방 안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벌컥 문을 연 각별이 놀라 대뜸 욕을 내뱉었다. 뭐야, 미친. 공룡 역시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각별을 쳐다봤다. 엥, 일 등? 나머지는? 각별이 들어와 앉으며 손가락을 문 바깥으로 가리켰다. 오는 중. 의외네... 형이 일 등을 다 하고. 각별이 벽에 기대어 휴대폰을 했다. 뒤이어 라더와 수현, 덕개가 함께 들어왔다. 잠뜰은? 신발 끈 풀어졌다고 바로 앞에서 멈췄던데? 각별의 물음에 수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뒤늦게 들어온 잠뜰이 전혀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해맑게 들어왔다. 돈 굳었다~. 신난 공룡이 리모컨을 집어 들어 영화를 고르기 시작했다. 공룡 넌 네가 내라. 6번 방 안에 웃음꽃이 피었다.

" 야. 수현아. 전화 계속 오는데 받아야 되는 거 아니냐. "
" 아, 미안. 무음이라. 전화 좀 받고 올게. "

영화가 흥미진진해질 법한 중반 부를 넘어섰을 때 수현의 휴대폰이 불나듯 울려댔다. 이미 수십 통 쌓인 부재중 전화 목록은 안 봐도 뻔한 전화들이었다. 방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던 수현은 얼굴이 굳었다. 응. 금방 갈게. 전화를 끊은 수현이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말똥한 눈으로 영화를 보던 공룡이 신난 목소리로 수현에게 얘기했다. 야, 저 사람이 범인 같아. 그치 않냐? 조용한 방 안에 공룡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룡아. 공룡이 말 대신 눈썹을 올려 대답했다. 나 가봐야겠다. 애들한테 말해줘. 당황한 공룡이 보던 영화에서 시선을 거뒀다.

" 어? 급해? 많이 안 급하면 좀만 더 놀지. "
" 응. 급해. 미안. 더 놀고 싶은데 어쩔 수 없네. "
" 야... 그래도 그렇지. 네 생일 축하 겸 졸업 축하 겸 노는 건데. 더 놀아주지 그러냐. "

수현이 웃었다. 미안하다니까 공룡아. 나 이제 가볼게. 가방과 겉옷을 챙긴 수현이 방문을 열었다. 우리랑 노는 것보다 중요하냐. 수현이 멈칫했다. 방문을 꽉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공룡이 빈정 상한 말투로 말을 툭툭 내뱉었다. 그까짓 거 다 놀고 가도 되잖아. 수현이 홱 돌았다. 공룡의 시선은 다시 티브이로 향했다. 주인공에게 총구가 겨눠졌다. 덕개가 뒤척였다. 부스스하게 눈을 뜬 덕개의 시야엔 수현이 들어왔다. 수현의 눈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이 가득 맺혀있었다. 당황한 덕개가 말을 꺼내려고 입을 벙긋거렸다.

" 공룡아. "
" ... 왜. "
" 네가 뭘 알아. "
" 뭐? "

네가 뭘 아냐고. 지금 노는 게 중요한지, 가봐야 되는 게 중요한지. 뭘 알고 말하는 거야? 수현이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꽉다물어 멈췄다. 덕개와 공룡이 동시에 당황했다. 어버버거리던 공룡을 뒤로 덕개가 여전히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쾅! 세게 닫힌 문 탓에 각별과 잠뜰이 놀라 깼다. 잠뜰이 깨며 바닥을 꾹 누른 탓에 라더 역시 눈을 비비며 깼다. 수현이는? 라더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 갔어. 한층 암울해진 표정으로 대답한 공룡의 뒤에서 각별과 잠뜰이 눈을 마주쳤다. 쟤 왜 저래? 몰라. 

각별의 시선이 티브이 선반에 놓인 너덜거리는 라일락 꽃다발로 향했다. 저거 다 떨어졌네. 나가면서 치워야겠다. 수현이 닫은 문의 충격이 라일락에도 향했는지, 이미 꺾인 라일락은 버티다 못해 결국 떨어졌다. 그새 시들시들해져 잔뜩 떨어진 라일락을 덕개가 주우며 말했다. 그만 갈까요. 공룡이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구겨질 듯이 꽉 쥐었다. 방안에 정적이 맴돌았다.



가게를 뛰쳐나온 수현은 잔뜩 망가진 얼굴로 병원까지 죽어라 뛰었다. 추운 날씨 탓에 귀와 코 끝이 벌겋게 변했다. 수현이 눈을 꽉 감았다. 수현의 니트에 걸린 라일락 한 송이가 떨어지며 밟혀 으스러졌다. 코 끝에 맴돌던 라일락 향기가 모두 사라졌다. 라일락의 꽃말이 우정이었던가. 멈춘 수현이 밟혀 으스러진 라일락을 보며 눈물을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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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힌 꽃은 다시 원래 형태로 돌아오지 않는다. 꺾인 꽃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찢긴 사진은 다시 붙지 않는다. 깨진 거울 역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깨진 우정은 다시 돌아가지 않았고, 돌아갈 수 없었다. 청춘의 끝자락이었다.


Written by. 짙지
Drawn by. 쓱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