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여행은
*약 트리거 주의*
누군가의 간단한 물음이, 우리들의 잔잔했던 일상에 큰 파동을 일으켰다. 어느 누구도,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불러올 재앙에 대해 알지 못했다.
우리가 대답을 달리했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엔딩을 맞이했을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또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면, 우리 여행이나 갈래?"
누가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우리에게 툭 던져진 질문 이후에는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곧 대답이 들려왔다.
"오, 좀 괜찮은 듯?"
"뭐야, 여행에는 나를 빼놓고 가면 안 되지! 공룡, 설마 나 빼놓고 가려던 거 아니지?"
갑자기 교실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책상에 엎드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는 무슨 일인지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지금 여행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던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야, 여행 가기로 결정된 거야? 다른 애들 의견은 물어봤어?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내 의견은 물어보기나 했냐?"
"에이, 너희들 의견은 필요 없지! 어차피 우리 가면 너희들도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어휴, 공룡 너는 입학식 때랑 달라진 게 없다 정말 •••."
그래, 공룡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여행의 주최자인 덕개와, 뭘 하던 공부만 아니면 다 좋다는 공룡, 여행이라는 소리 하나만 듣고 좋다고 해버린 수현과 계속 여행 같이 가자고 말을 거는 공룡이 귀찮아서 아무 생각 없이 동의한 각별.
네 명의 동의로 우리는 어쩌다 보니 여행을 가게 되었다.
여행에 대해 의견을 내지 못한 라더도 딱히 싫은 눈치는 아니었던 것 같다. 뭐, 싫더라도 청춘의 끝자락인데 친구들과 여행 한 번 정도는 눈감아주지 않았을까?
앞에서 싫은 척은 했지만, 사실 나도 좋았다. 내 인생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청춘의 마지막을 친구들과 함께 기분 좋은 여행으로 마무리한다니. 덕개의 아이디어를 좋은 아이디어라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꽤 괜찮은 생각 아닌가?
"라더야, 우리 여행 가기로 했어! 아, 뭐라고? 너도 당연히 갈 거라고? 알았어!"
"...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에이, 내가 너랑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네 속마음 정도는 가뿐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니까~ 하여튼 너도 같이 간다는 뜻으로 알고 있을게!"
"하... 정공룡 진짜."
정말 공룡은 고등학교 졸업을 할 때나, 고등학교를 입학했을 때나 달라진 게 단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우리도 이제 성인인데 좀 철이 들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래서 얘들아. 뭘 제대로 정하긴 했니? 어딜, 어떻게, 뭘 할 건데?"
"그, 그렇네. 수현아, 네가 말해봐."
"뭐야, 그걸 왜 인제 와서 나한테 물어. 난 너희 둘이 이미 다 정하고 말하는 줄 알았지! 여행 가자고 한 건 덕개, 공룡 너희잖아?"
"야, 덕개. 옆에서 나 비웃지만 말고 네가 한번 말해봐. 정말 너도 아무 계획 없어?"
갑자기 자신에게 돌아온 공룡의 질문에 당황했는지, 방금까지만 해도 옆에서 공룡을 비웃던 덕개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어, 대충... 차 타고 어딘가에 가면 되지 않을까? 운전은 당연히 운전면허 있는 각별이 하고!"
"그건 당연한 소리잖아 ••• 그러면 뭐 겨우 고등학교 3학년인 우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서 여행가냐? 그리고 운전 담당은 왜 또 나야?"
"그야, 운전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너밖에 없으니까?"
"그것만 알고 있어, 나 운전 잘 못 해, 분명 난 내가 운전 잘 못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도중에 가벼운 접촉사고라도 나게 된다면 나한테 화내지 말라고."
'사고'라는 단어가 나오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각별은 확 가라앉은 분위기가 마음에 든 건지, 아니면 자신이 운전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인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운전을 하기 싫더라도 신나게 여행 계획을 세우다가 자동차 사고 얘기라니 ••• 생각해보면 우리 중 가장 철없는 사람은 각별이 아닐까, 싶다.
"아, 진짜. 여행 전에 재수 없는 얘기는 그만 집어치우고, 운전 담당은 각별 확정이네, 확정."
"하..."
각별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그 표정은, 정말 자신이 운전하기 싫음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운전, 그게 뭐라고 저런 나라 잃은 표정을 짓는 건데?
"야, 미리 안전운행 부탁할게. 운전 잘해라 알겠지?"
솔직히 말하면, 반은 진심 어린 걱정으로 이루어졌고 반은 협박으로 이루어진 말이었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적어도 그 말의 반은 진심이었다.
"네, 네. 잘 알겠습니다. 이제 너희 알아서 계획 좀 짜고 계세요, 난 역할 하나 받았으니까 간다?"
"뭐야 저 기분 나쁜 웃음은 ..."
웃음기가 가득한 각별의 한 마디였다. 그리고, 각별은 정말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저 어딘가로 튀어 나갔다.
"아, 귀찮게 무슨 계획을 다 짜래. 야, 그냥 우리 계획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날짜만 딱 정하자. 원래 아무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이 제일 즐거운 거 아니겠어?"
"공룡 저 자식은 뭘 하던 항상 계획이 없ㅇ..."
"뭐라고?"
"아니, 그냥... 네 생각이 좋다고 말했지 뭐..."
"그러면 이제 잠뜰은 시간만 정하자는 내 의견에 동의했네? 이제 넌 아무 말도 얹지 마세요~ "
아, 진짜. 하필 귀는 왜 이렇게 밝아서 혼잣말까지 다 들어. 물론 내가 일부러 공룡이 들으라고 좀 크게 혼잣말을 한 것도 맞지만, 그걸 굳이 콕 집어서 다시 물어볼 필요까지는... 괜히 마음에도 없던 공룡 칭찬이나 했네.
그건 그렇고, 아무리 그래도 뭘 할지는 정해야 하지 않을까 ...
"그러면, 어차피 내일 토요일이니까 내일 가는 거로 결정할까?"
"그래, 그러면 각별 집에서 만나는 거다?"
'설마 정말 아무것도 안 정하지는 않겠지, 했는데 얘네를 믿은 내가 바보지. 얘네 진짜 대책없네 ...'
"야, 그래도 몇 시에 만날지는 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 각자 다 다른 시간에 각별 집 앞에 모이면 안 되잖아."
설마, 설마 했지만... 몇 시에 만날지조차 정하지 않으려고 했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한 귀로 듣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 여행은, 망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오후 3시에 모이는 거로 하자. 다른 생각 있는 사람?"
"그래, 그냥 그렇게 해라 ..."
잔뜩 들뜬 공룡과 덕개는 지금 여행이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가 바쁘게 지나갔다.
"각별이 시간 안 지킬 것 같아서 일부러 각별 집 앞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수현이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예전에는 시간약속은 꼭 지키더니."
"아, 그거... 내가 먹을 것 좀 사 오라고 해서 늦는걸지도 ...?"
"뭐야, 간식 담당 수현이였어? 그건 그렇고, 우리 어디 가는데?"
뭐야, 얘네 지금 각별한테 뭘 어떻게 정했는지도 얘기 안 해놓은거야 ...?
각별이 아무 계획도 없는 거 알면 또 화내겠네.
"그, 그러니까, 이거 듣고 화내지 마."
"또 뭔 짓을 했길ㄹ..."
"우리 사실 아무것도 안 정했어~"
"아니, 내가 기껏 운전까지 해준다고 마음먹었는데 아무것도 안 정했다고? 너희 제정신이냐?"
"그렇게 화낼 거면 니가 좀 계획을 세워보시던가!"
"진짜 한마디를 안 져주네. 계획 세우는 건 여행이라는 아이디어 낸 너희들 몫이잖아, 아니었냐?"
"그렇긴 한데 그래도 니가 좀 도와ㅈ..."
또 둘이 싸우는 건가, 싶을 때 딱 알맞은 타이밍에 수현이가 도착했다. 수현이가 약속 시각에 안 늦었으면 하마터면 둘이 진짜 싸울뻔했네.
"수현이 왔네. 출발할까?"
"출발하긴 뭘 어디로 출발해. 어디 갈 건지도 안 정해놨으면서!"
"산은 벌레 많으니까 싫어할 테고, 바다에 갈래?"
"추워 죽겠는데 이 날씨에 무슨 바다를 간다고 ..."
잠시 상상해 보았다.
일렁이는 물결과 하얗게 부서지는 겨울 바다의 파도들, 조용한 바닷가의 파도 소리.
여름 바다의 청량하고 시원한, 청아한 파도와 겨울 바다의 날카롭고 차가운, 또 격렬한 파도의 느낌은 충분히 달랐다.
물론 조금 쌀쌀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항상 여름에나 가끔 갔던 바다를 겨울에 가본다니 색다를 것 같긴 했다.
"왜, 좋네. 조용하게 바다 좋지 않아? 바다로 가게 된다면 해넘이 보자, 나 해넘이 꼭 한번 보고 싶었어."
"자, 잠뜰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
붉은 해가 화려하게 하늘을 한참 동안 장식한 후, 자기 일을 마치고 차가운 달님에게 자신의 역할을 넘겨주는 장면.
출렁이는 파도 위로 유유히 사라지는 찬란한 태양. 그동안 바쁘게 살아왔기 때문에, 해에 관심을 줄 시간은 없었으니까.
그동안 바쁘게 달려온 모든 것이 끝나가는 지금, 나는 해넘이가 보고 싶었다. 우리의 청춘과 같이 저 멀리 사라지는 태양이 보고 싶었다. 찬란했던 나의 마지막 청춘과 태양을 함께 흘려보내고 싶었다.
.
.
.
.
"그러면 바다에 가기로 결정된 거지? 그냥 빨리 타라. 나 혼자 차 타고 도망치기 전에."
조용히 출발하는 차에 타고 있는 우리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열심히 달려왔던, 아니, 함께 지칠 만큼 열심히 뛰어왔던 우리들을 보며.
흙먼지를 날리며 서로 경쟁하고, 서로를 물어뜯던 우리들. 물론 우리들이 그만큼 친하기에 그럴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나는, 복잡한 감정들과 생각들을 치워내고 잠시 얕은 잠에 빠졌다.
잠시 잠들어있던 나를 깨운 소리는, 한 줄의 감탄이었다.
"야, 눈 온다. 추워서 바다에 오래는 못 있을 것 같고 ••• 도착 예상 시간만 맞춰서 도착한다면 해넘이 시간이랑 딱 맞겠네."
이미 꽤 많이 피어있는 눈꽃들을 보니 눈이 오기 시작한 지 꽤 지난 것 같은데. 각별은 여태까지 운전을 하고 있었을 테니 절대 눈이 오는 걸 못 알아차린 것은 아닐 테고, 그저 우리 중 누군가가 잠에서 깨어나길 바라면서 조용히 입을 닫고 있었던 걸까.
자기가 운전해야 해서 같이 가기 싫다더니, 그래도 마냥 싫기만 한 건 아니었나 보네.
높은 하늘에서 천천히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순수한 흰색의 눈. 예뻤다. 지금까지 봐왔던 눈이 내리는 풍경 중 가장 예뻤다. 찬란한 눈에 닿고 싶어 손을 뻗으면 닿자마자 한 방울의 물이 되어 사라지는 눈송이들. 스쳐 지나가는 자그마한 흰 꽃잎들을 보며 슬며시, 나는 웃음을 지었다.
잠깐이었다.
그저 머릿속의 모든 생각들을 비워내고 멍하니 흔들리는 차 안에 앉아 떨어져 내려오는 꽃잎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바깥 풍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나의 눈은 끝내 초점을 잃고 말았다.
흔들리는, 그러니까 ••• 정상적인 차의 진동보다 훨씬 더 강한 흔들림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곧이어, 햇빛에 반짝이는 투명한 파편들이 내 눈 앞을 가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잠이 쏟아졌다.
아,
손끝의 감각은 점점 무뎌졌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점점 호흡하는 행위가 불필요하다 느꼈고
어느새 호흡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눈은 스르르 감겨 내려왔고,
잉- 하며 뭉개진 채로 나의 귓가에 울리는 주변의 소리는 그저 날 귀찮게 할 뿐이었다.
고통은 점점 사라졌고, 나의 시야도 서서히 흐려져 갔다.
우리가 함께한 찬란했던 기억은, 허공 속으로 흩어진 유리 조각처럼 순식간에 아스러져 사라졌다.
"각별... 너 운전 못... 한다더니... 그거... 진심이었구나... 그동안... 고마웠,"
부족한 숨 때문에 미쳐 말을 끝내지 못했다.
우리들의 찬란한 기억을 한 문장에 담기에는, 문장이 너무 짧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짧은 문장조차도 마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있지 않았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짧았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 가혹하리만큼 짧았다.
정말로 이게 마지막이라면, 조금 더 즐기면서 살 걸 그랬어.
조금은 걷고,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하며 살 걸 그랬어.
끝내지 못한 말들을 입에 가득 머금은 채 나는, 잠이 들었다. 아주,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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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깨어났다.
눈이 떠진 후에 보이는 교실의 풍경은 더없이 평범했다.
어디선가 분명히 보거나 겪은 적 있는 상황인데, 도무지 어디서 언제 겪은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혹시, 여... 행?'
허공 속으로 흩어져버린 나의 기억을 하나하나 다시 끌어모으며 겨우 떠올린 단어는, 다름 아닌 여행이라는 단어였다.
"여행이나 갈래?"
'뭐야, 이거 뭔데. 방금까지 책상에 엎드려서 잠에 빠져있던 내가 도대체 왜, 지금 애들이 얘기하고 있는 주제가 뭔지 알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내가 왜 똑같은 상황을 언젠가 본듯한 느낌이 드는 건데?'
분명 흐릿한 나의 기억 속에서는 이 순간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잠에서 깨어보니 다들 여행이라는 주제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흩어져버린 내 기억의 조각을, 천천히 맞춰나가기로 했다.
'우리는, 곧 졸업이니까 우리끼리 여행을 가기로 했었고 얘네 중 한 명의 집에서 만난 것까지는 기억이 나. 그리고 누군가가 운전했던 차에 탔는데 ••• 아마 각별이겠지. 그리고 그 뒤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기억이 안 나.'
기억이 나지 않는 것들을 억지로 떠올리려니 머리가 아파졌다.
더는 모르겠다며,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나 자신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자신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사색에 빠진 나를 깨운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기대감에 차 있는 목소리는, 나에게 확신을 주었다. 내 눈앞의 모든 것이 뒤섞여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중이라 그 어느 쪽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던 나에게 확신을 주었다.
썩 달갑지 않은 내용에 대한 확신이었지만 말이다.
"야, 잠뜰. 우리 여행 가기로 했으니까 꼭 같이 가야 한다? 이미 4명이나 동의했어. 라더랑, 너 빼고 4명 다."
"응, 그래. 알겠어."
"아 뭐야~ 왜 그렇게 반응이 미지근해. 좀 기뻐하라고! 우리 6명이 함께한 졸업 전 마지막 여행인데 좀 눈치껏 기뻐하지 ..."
넌 몰라, 넌 모를 거야.
내가 지금 무슨 상황에 부닥쳐있는지 모를 거라고.
비현실적인 거짓말이라고 믿고 있었던 현상이 나한테 실제로 일어나는 것 같다고, 타임 루프가 일어난 것 같다고.
네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여행이, 마지막이 아닐 거라고.
끊임없이 반복될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영원히 이 시간에 갇혀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여튼, 운전 담당은 각별이고, 내일 당장 출발하기로 했으니까 알고 있으라는 거야."
이것이 정말 루프가 맞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나는 또 다른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지금이 만약 첫 번째 루프가 아니라면, 이미 수천 번의 루프를 반복한 뒤라면?
그 수천 번의 루프를 지나왔지만 결국 내가 바꿀 수 있는 운명 따윈 없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라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루프가 일어난 것일까?
복잡한 생각들을 꾸역꾸역 다시 눌러 담았다.
그리고, 또다시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내가 무엇을 하던,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아, 황수현 얘는 또 왜 안 오는 거야."
"어디 갈 건지도 안 정해놓고 애가 안 온다고 타령하기는 •••. 늦을까 봐 걱정할 시간에 미리 뭘 정해놓던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정말로 수현이 나타났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고, 그건 틀림없이 수현의 실루엣이 맞았다.
"나, 늦었 ••• 많이, 늦었어?"
"그래, 20분이나 늦었어! 물론 몇 주 전, 약속에 1시간이나 늦은 각별보다는 낫지만 •••."
"또 그 얘기 하네. 지난 일은 꺼내지 말자니까?"
"다 왔으니까, 빨리 출발하자. 난 바다를 보고 싶은데 다른 의견 있는 사람?"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왔다.
그렇게 아무 계획도 없었냐고 화내던 각별도 사실 딱히 어딜 갈 건지 생각은 하지 않았던 건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바다를 향해 천천히 달려갔다.
누가 얘기를 꺼냈는지 모를 해넘이를 보기 위해서.
얼마를 달려온 지 알 수 없을 만큼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차갑고 흰 눈이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손에 닿기 전에는 찬란하지만, 손에 닿으면 순식간에 한 방울의 물이 되어 사라져버리는, 마치 경화수월 같은 눈.
그래도, 나는 눈이 좋았다.
"야, 눈 온다. 도착할 때까지 잠만 자지 말고 밖에 풍경이나 좀 봐, 그렇게 오고 싶었다던 바다까지 데리고 와줬는데."
기억났다.
어제, 아니. 오늘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제일 최근에 일어난 루프에서도 눈이 왔었다.
아, 눈이 왔던 기억의 다음이 기억났다.
기억나지 않았던, 잘려 나간 기억이 돌아왔다.
야, 각별!
지금 당장 속도 줄,
아, 늦었구나.
또다시 ••• 또다시,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우리들의 참담한 미래에 대한 걱정과 영원히 반복될 똑같은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운명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기나 했을까?
이 루프를 끝낼 방법은 있긴 한 걸까?
우리는, 결국 이런 엔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시야가, 나의 눈앞이 흐려졌다.
운명을 바꾸어 보려 노력했지만 결국 나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던 걸까,
아니면, 충분히 운명을 바꿀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무 늦어버린 걸까.
몰려오는 졸음을 막기 위해 애써 몸을 움직이려 하면 찾아오는 온몸이 깨질듯한 통증에, 나는 이내 몸을 축 늘어뜨렸다.
이미 흐릿해진 초점 덕에,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밝게 빛나는 태양뿐이었다.
붉은빛을 내며 천천히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태양을 보며,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나는 또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들의 문장에 쉼표를 남기기 위해 시작했지만, 결국 마침표를 남기게 된 우리들의 여행은 저 멀리 넘어가는 태양과 함께 조용히 막을 내렸다.
우리들의 마지막 청춘 여행은, 우리들의 청춘은, 천천히 막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었다.
우리들의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Written by. 단향
Drawn by. 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