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FOLD
YOUR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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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점終點


그게 무엇이고 어떤 것이든, 지나가는 행인이나 아무 죄 없는 사람 하나를 그냥 아이의 어른스럽지 못한 장난 마냥 즐겁고 멍청하게 삼켜버리곤 하는 뜨겁고 화려한 큰 불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의 쓸데없는 발길 한 번에 꺼질 조그마한 불씨에서 출발하는 법이다. 괜찮을 거라는 부주의함과 안일함을 먹이로 삼아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불은 그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하고 죽는 법이, 모두들 알고 있듯 거의 없다. 이미 많은 사상자를 내보내는 그런 큰 불은 어찌해봤자 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 정론이었다. 인간의 머리가 아무리 똑똑하다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하나의 작은 생명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따금 주의를 기울이는 데에 노력을 붓지 않고 괜찮겠거니 넘어가버리곤 하지. 그게 제 발목을 전부 태워버릴 거라는 걸 모르고서. 어쩌면 기억해야만 하는 상대를 전부 태워버리는 것도 지나치고.

 어쩌면 그저 지나쳤을 수도.

 난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점수가 그 모양 그 꼴이었지?
 네가 시험 기간에 맨날 게임만 하고, 놀러 다녀서 그런 거 아니야? 아, 그건 모르겠고. 배고프다고. 밥 사줘. 곧이어 쓰러지는 듯한 시늉을 하면서 의자에서 스르륵 내려갔다. 동시에 작은 목소리로 공룡은 잠뜰에게 말을 꺼냈다. 잠뜰은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돌아가있던 허리를 바로 돌렸다. 그래, 알겠으니까 좀 똑바로 앉아라. 척추 수술 돈 많이 깨진다. 그러고 보니 이 짓 전에도 한 거 같았는데. 뭐 공룡이 이런 짓을 매일 하기야 하지만 조금 더 남는 기억이 있었고 말고. 눈을 감고 어두운 기억 속에서 한 편을 끄집어 내보니 찾은 기억은 그때는 아직 여유롭지 않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불운한 시험 기간이었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학생들에게 제일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는, 어쩌면 그들에게는 더욱 더 남을 그런 일이었다. 마지막이었으니까.
 데구르르. 각별이 가지고 있던 연필이 아래로 떨어지며 바닥과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옆자리인 잠뜰의 연필은 종이에 긁혀 사각, 소리를 내었고, 공룡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자신의 책이 아닌 잠뜰의 글씨가 빼곡하게 적힌 문제집을 두 눈으로 빤히 쳐다보았지만, 그것에도 흥미가 금방 떨어진 것인지 자신의 책상에 똑바로 엎드려 잠을 청하고 말았다. 무덥고 찝찝한 여름이 지나가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지나가는 하나의 평범한 일상. 불협화음처럼 어찌해도 어울릴 수 없는 그런 비굴한 학생의 마지막을, 누가 밀어주는 사람 하나 없이 직접 발을 내디뎌 달리고 있었다. 여름과 겨울 사이. 그 애매한 계절에서 학생들은 언제나 바쁜 것은 어쩔 수 없었으니. 언젠가는 올라가고, 보이지 않는 종점을 향해 계속해서 영원토록 달려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잠뜰은 고작 공룡이 시험을 포기하고 잠을 자는 그런 일에 생각을 쏟을 시간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 가지였을 것이다. 특히, 저 각별이나, 각별이나, 각별은... 잠뜰은 대수롭지 않은 언제나 있던 일상이라 생각하고 지나치며 문제집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사락. 잠뜰은 아직 빈 곳이 다수인 새로운 페이지에 적혀져 있는 문제들은 두 눈으로 바라보았다. 간결하게 적혀있는 문제는 깔끔하게 잉크로 칠해져 있었고, 검은색이 대부분인 무채색의 문제들이 하나 같이 길고, 어렵고, 풀기 싫고...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으로만 하던 말들이 모두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입까지 넘겨졌나. 무의식적으로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와버렸다. 그래도 작게 말해서 다행이지. 정공룡이 들었으면... 어휴, 정공룡 저 자식한테 옮았나 보네. 잠뜰은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고개를 저었다. 야. 왜. 밥 먹으러 갈래? 진짜? 그럼 가짜겠냐? 먹기 싫으면 오지 말던가. 누가 싫대? 빨리 가자. 잠시만 좀 기다려봐. 이것만 풀고 가자고. 잠뜰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공룡은 언제 자리에서 일어난 건지 재빠른 움직임으로 이미 문 앞에 서 있었다. 쟤는 도대체 뭐지? 일종의 장난이었지만 이상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저게 정말 사람이냐.
 그래. 그랬었지. 누가 들으면 아주 옛날인 줄 알겠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그 평소의 일이었기에 잠뜰은 대수롭지 않은 듯 금방 그 기억을 머릿속 어딘가 아주 깊은 곳에 넣어놓고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다만 생각을 한 탓일까 이어지던 집중력이 금방 흐트러지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문체가 이제서야 뒤죽박죽 섞인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야, 공룡. 그냥 우리 밥 먹으러 도망갈까? 잠뜰은 문제집에 박고 있던 머리를 위로 들며 공룡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하기 싫다할 때부터 알아봤어, 내가. 각별은 또 잠뜰이 조용하게 입 밖으로 꺼낸 말을 들은 것인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잠뜰의 책상을 검지 손가락으로 두어번 두드렸다. 뼈마디로 책상을 두드렸던 것이라 딱딱한 소리가 울리며 잠뜰의 고막을 강타했다.
 그래서 니네 뭐 먹을 건데. 그러게 뭐먹지? 난 아무거나 좋은데.
 아무거나가 제일 어려운 답인 거 모르냐? 어쩌라고. 각별은 공룡의 답에 눈을 찌푸렸다. 저런 대답이 나올 것이야 예상하고 있던 일이지만 막상 들으니 자신도 생각나는 게 없어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잠뜰은 제 옆과 앞에서 말을 주고받으며 큰 소리로 싸우는 각별과 공룡은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저 녀석들이랑 친구라니. 말할 필요도 없다 생각했을 때 각별이 앞만 보던 고개를 돌려 뒤에 있던 그들을 바라보았다(이제 더 싸울 생각인가? 시끄러워지겠네. 잠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 주변 사람들은 신경을 안 쓰려 노력했지만 그렇게 시시각각 싸우는 데, 그것도 저렇게 큰 소리로 싸우는 데 그 누가 눈길을 안 줄 수가 있으랴. 너희들은 조용하게 지나가는 날이 어떻게 하루도 없을 수가 있냐? 잠뜰은 어깨를 들썩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냥 근처 떡볶이나 먹지?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우리들 중에서 말한 사람이 없다면 이 목소리는 분명 라더일 것이라 추측했다. 싫어! 하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각별과 공룡이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대답을 꺼낸 말이었다. 근데 그 대답이란 게 싫다는 말이라니. 기꺼이 추천해준 보람이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그냥 니네 알아서 정해라. 라더는 눈은 여전히 그 둘에게서 고정시킨 채로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그럼 라더야. 나는 떡볶이 먹을 테니까 사줄래?
 누가 사준다고 했나?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정도로 갑자기 나타난 수현이 라더 등 뒤에서 불쑥 생겨났다. 가만 보면 소환된 몹같아. 그대로 말은 이어지고 잠뜰은 양옆에서 티키타카 하는 싸움소리를 들어야했다. 슬슬 짜증이 올라오던 잠뜰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결국에는 큰 소리를 내지르며 네 명에게 말했다. 그냥 떡볶이 먹어!
 떡볶이는 싫은데. 공룡은 아직도 뾰로통한 입을 내빼며 천천히 걸었다. 혼나기 싫으면 제대로 따라오는 게 좋을 걸? 아, 그래도 싫어. 그런 공룡을 보자 라더는 그에게 황당한 어투로 이야기했다만 공룡은 그의 말을 똑바로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어떻게 되어도 떡볶이는 먹기 싫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가 저 대답을 하고 나서 막상 가게에 도착하면 무슨 짓을 벌일지는 잘 알았다. 자기가 제일 좋다는 표정으로 먹겠지. 그건 안 봐도 번한 흔한 레파토리 중 일부분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떡볶이 가게는 빨간 외벽과 하얀 우드톤으로 잘 정리되어 있는 우리 학생들에게는 유명한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언젠지 기분이 또 금세 풀린 공룡은 자기가 먼저 들어가겠다고 가게 유리 손잡이를 잡고 당기시오라 붙어있는 팻말을 못본 채로 유리문을 밀었다. 어라? 이거 왜 안열리냐. 왜 안 열리긴. 당겨야 열리니까. 아, 그런 거야? 공룡은 머쓱한 웃음을 한 번 짓고 팻말에 쓰인 대로 문을 당겼다. 그래도 안 열리는데? 뭐라고? 이야, 오늘 문 닫았는데? 오우... 다섯명은 문이 굳게 닫힌 떡볶이집 앞을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주변 가게를 탐색했다. 열린 곳이 하나도 없이 모두 굳게 닫힌 문들에 그들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뭐냐? 무슨 마트 정기휴무도 아니고 다 문을 닫았어? 잠뜰이 학교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까지 확인해봤지만 역시나 닫혀있는 문은 열릴 생각도 없었다. 깨부수지 않는 이상 열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잠겨 있는 문들에 그들은 허망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배고픔도... 야, 그냥 돌아가자.
 허무하게 끝난 학교 탈출은 그들에게는 한숨만 나올 경험으로 기억되었다. 근데 우리 한 명 안 데리고 갔었냐? 아, 맞다. 덕개가 없네. 몇분 앞만 보며 걷다 보니 금방 학교에 도착한 그들은 한 사람의 부재를 돌아와서야 깨닫는 듯한 면모를 보여줬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서 달려오는 덕개에게 다섯은 장난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 같은데.
 누나, 지금 학교가 이상해졌어.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덕개야? 그걸 장난이라고 치는 거야? 거짓말 실력을 더 늘려야겠네, 우리 덕개. 잠뜰과 각별, 그리고 나머지 셋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덕개에게 믿음보다는 더욱 더 장난을 건넸다. 이게 거짓말인 거 같아? 갑자기 큰 소리로 소리치는 덕개의 말에 모두들 깜짝 놀란 것도 잠시. 그들은 이제서야 평소와는 다른 이질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선생님들의 부재와 조용한 학교 운동장. 모두 문을 닫은 가게며, 건물들은 그들이 위화감을 갖게 하는 것에는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제서야 덕개의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다섯은 자신들이 있던 학교, 그리고 반대편에 있는 기다란 길을 바라보며 몸에 들어오는 이질적인 느낌을 받아들였다. 모두가 사라지고 잿빛 세상이 되어버린 도시. 남은 사람은 우리 밖에 없으며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끊임 없이 인생의 종점을 향해 달리는 것뿐인 고작 학생.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를 갑작스러운 사고에 그들은 당연히 대비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박잠뜰. 우리 괜찮겠지...? 공룡은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움직여 잠뜰에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 귀에 뭐가 들어오겠나? 잠뜰은 공룡의 말을 듣지 못하고는 다급하게 학교 안에 있는 모든 교실을 열었다. 다만 그렇게 찾아봤자 나오는 건 방금까지 생명이 있었던 과거의 차가운 흔적들뿐이었다. 덕개야.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갔어? 나도 모르겠는데... 도서관 책 정리하다가 조용하길래 봤더니 아무도 없어졌단 말이야. 아니, 어떻게 그걸 못 봐! 실수였지만 목소리가 커졌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고, 꼭 큰 무언가에 잠식되어 고요함만을 외치고 있는 세상이 그들을 놀려주려고 덩그러니 그들만 놔둔 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신이란 것이 이렇게나 장난이 많아서야. 각별은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두 사람을 보며 분명 평화로웠던 전 시간을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이 회색빛이 돌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우린 여기를 떠나야한다. 이곳에 가만히 있어봤자 해결되는 것은 없다. 우리는 살아야만 하고, 버텨야만 한다. 그래야지 다른 사람들도 돌아올지 모른다. 수현은 싸움을 중재하고, 라더는 나갈 채비를 하고, 진정이 조금 되었는지 잠뜰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모두에게 말했다.
 준비가 다 되면 그때 나가자.
 몇 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까. 마치 세상이 멈춰버린 것 같은 공간 속에서도 시계는 돌았고 그로 인해 시간은 흘러갔다. 각자의 물건과 음식들을 꼼꼼하게 챙기고 학교 정문 앞에서 모인 그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 생각을 억지로 집어꺼내며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 어디 가야 하지? 살아있는 사람이 있긴 할까? 음식이 떨어지면 문이라도 깨야지. 우리 괜찮은 걸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모두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신은 그들의 이런 표정을 보길 원했던 건 아닐까. 바보 같은 신의 집요함에 그들은 농락 당하고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것이 진실인지 혹은 꿈인지. 불과 최소 30분 전에는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는지. 분명히 즐거웠고 행복했던 하루가 지금, 이 순간 바로 바스슥 하고 사라졌다. 학교에서 한 발, 두 발... 내디디고 내딛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길을 멈췄다. 아직 학교가 잘 보이는 풍경이었기에 그들은 그 자리를 또 쉽게 떠나지 못했다. 신이 있다면 빌고 싶을 심정으로, 과거로 시간을 돌려달라는 그런 소원을 빌고 싶은 심정으로 그들은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들의 발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 고요함이 그들은 불편했고 두려웠다. 이대로 있어봤자 현재가 다시 돌아올 수나 있으려나?
 다행히 문이 닫힌 것은 가게뿐이었다. 왜? 이것이 다 무슨 일인지 그들은 알 수 없었지만 그것만은 다행이라 그리 생각했다. 그것만. 그들은 이런 상황에 눈을 찌푸리기도 하고 장소를 탐색하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조용한 근처 빌라 하나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식량이 부족하면 털면 되는 거고. 그러니까 식량을 발견하기 가장 편한 곳으로 자신들의 안식처를 설정했다.
 우리 음식 얼마나 있지?
 한 이틀치 정도는 있는 거 같은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이틀? 아니야. 하루도 정도 될 거 같은데.
 자신들 가방 안에 있던 음식들을 다 꺼내 봤지만 그리 많은 음식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편의점에 가서 먹을 걸 사 온 수현이 없었으면 생각보다 많은 양의 음식은 눈 씻고 봐도 없었겠지. 잠뜰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 음식들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머리를 굴렸다. 분명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음식을 가져오면 되는 거지만, 정말 아무도 없는 것은 상상도 안 해봤으니까. 조금은 망설여졌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야지. 망설였던 마음을 금세 닫으며 살아야 한다는 단어 하나를 굳게 믿었다.
 다른 사람은 더 없을까?
 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르겠지. 라더는 가방에 있던 나머지 물건을 하나씩 꺼내며 말을 했다. 가방 안 모든 물건을 꺼내고 나서야 라더는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꺼낸 물건들을 눈으로 훑었다. 생존자도 찾는 김에 나가면 되지. 위험하지도 않을 걸.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자 모두의 시선은 그에게로 집중됬다. 나갈 사람? 나. 수현과 공룡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그래, 회색빛 도시여도 살아갈 사람은 살아야지.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라더는 공룡과 수현을 일으켜 세웠다. 음식 안 부족하게 많이 들고 올게. 어차피 위험한 것들은 이제 다 없으니까. 우리 말고는. 각자의 빈 가방을 들고는 금세 밖으로 나간 세 명을 제외하고 남은 잠뜰, 각별, 덕개는 여기 집이 대체 누구 집이었을지. 이 사람은 어쩌다가 사라졌을까. 주변 물건들을 손으로 집고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추측하고, 절망했다. 배달만 시켜 먹었냐 어떻게 있는 게 김치랑 라면. 아, 그거라도 있는 게 다행이지. 깨끗한 주방은 역시 아무 것도 해 먹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몇 날 며칠을 살아야 하는 구나. 언제까지? 이 세상이 다시는 설 땅이 없어질 때까지? 아니면 우리의 목숨이 흐름에 거역하지 못하고 소멸할 때까지? 대체 언제까지 이 희망을 갈구해야만 하는 것인지 떠올릴 수는 없었다.

 아직 시험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유일했던 과거에, 그렇다고 그렇게 오래된 과거는 아니지만. 어떻게 사람이 그들 밖에 없다고 해서 도시가 이렇게 금방 멸망하는 건가? 조용함에, 불행함에 익숙해질 정도가 되니 이제는 자신들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안위까지 챙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지나도 다른 생존자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저 그들만이 그 세상의 주인이고, 멸망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인간이었다. 생명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그런 막막한 회색 도시에서. 고요함이 그들의 세상을 집어 삼킨 또 다른 미지의 공간에서. 눈을 떠야 하고, 발을 내디뎌야 하고, 심장은 뛰어야 했다. 이번에는 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하였다. 다른 곳에는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고, 우리처럼 이 멸망한 세상을 악착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그것이 이 세상의 끝이라 하더라도. 끝을 아직 보지 못한 그들이었지만, 끝이 있을 거라 믿은 것도 그들이었다. 그들의 종점은 도대체 어디고, 멸망의 끝은 어디인가. 앞으로 내달려봐도 나타나지 않을 세상의 끝을 그들이 닿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세상을 멸망하게 만든 주범인 인간들뿐이라 닿을 수 없을지도.

 어쩌면 그저 지나쳤을 수도.

Written by. 후아
Drawn by. 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