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여행
"얘들아"
방금까지만 해도 소파에 엎드려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공룡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듯 벌떡 일어나며 옆에 앉아있던 박덕개와 서라더를 향해 거의 외치듯 말했다.
"션쌤 내일 밖에 휴가 가신댔지??"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의 모습이 뭐가 우스웠는지, 공룡은 킥킥 웃으며 어릴 적부터 밤에 연구소를 돌아다녀 보자거나 몰래 수현선생님 방에 들어가서 숨어있어 보자는등 이상한 생각이 났을 때마다 항상 반짝이던 그 까만 눈을 그날따라 더욱 빛내었다.
"오랜만에 여행이나 갈까? 잠뜰이 데리고."
"어..? 몰래 나가게? 저번 달에 몰래 나갔다가 걸려서 외출금지 풀린지 얼마나 됐다고.."
라더의 물음에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저번에 걸린 건 국장님이 션쌤한테 전화해서 그런 거였다며 능청스럽게 떠들어대는 공룡을 말리기는 커녕 좀 지루했다며 좋아라하는 덕개를 라더는 그냥 바라볼 뿐이였다.
"나는 빼줘. 혹시 국장님 왔을 때 아무도 없으면 의심받을꺼아냐.."
"뭐? 진짜?"
"잠뜰이도 데리고 갈껀데 진짜 안갈꺼야?"
"안부나 전해줘. 언제 한번 여기도 놀러오라고 하고.."
조용히 대답하는 그를 둘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행 계획을 새웠다. 몇분을 끙끙거리다가 겨우 나온 의견은, 여로고등학교로 돌아가 지금까지 갔던 곳을 돌자는 계획이었다. 자기보다 1살 많다기엔 아직도 아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깔깔대는 그들을 라더는 조용히 바라보다가, 덩달아 피싯 웃었다.
나중에 다 같이 놀러 가자며 손을 흔들고 밖으로 나서는 수현을 배웅하고서 셋은 안전가옥으로 돌아가 딱히 든 건 없지만 어젯밤 고심하며 싸둔 작은 가방을 둘러맸다. 형들 근데 잠뜰이한테 연락은 했어? 지금 해야지. 그 말에 라더는 잠깐 눈을 깜빡이며 둘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연락부터 해봐.."
잠뜰은 주말 아침부터 갑작스럽게 옛 친구들에게서 온 문자를 받았다. 안바쁘다면 오랜만에 만날 겸 여로고등학교 앞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어느 누가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당일날 아침부터 만나자고 나오라고 하겠냐마는, 바로 공룡이 그랬다. 잠뜰은 저 성격 어디 안 간다며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곧 나간다고 문자를 보냈다.
1월의 날씨는 추웠다. 뭘 입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그냥 여로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잠뜰은 공기 중에 흩어지는 하얀 입김을 바라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저께 왔던 눈은 아직 녹지 않은 채, 길가에 얼어붙어 있었다.
"잠뜰~~~!"
멀리서 공룡의 외침이 들려왔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지,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다가오는 공룡을 향해 잠뜰은 한숨만을 내쉴 뿐이였다.
"그래서, 뭐할 건데요? 라더는 안 온 건가?"
"아~ 라더는 우리 몰래 나간 거 안 들키게 안전가옥에 남아있어. 자긴 잘 지내고 있다고 안부 전해 달라더라. 또 언제 한번 IPS에도 놀러 오라는데"
잠뜰은 신이 나 재잘거리는 공룡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나중에 라더랑 수현쌤 얼굴 보고 싶어서라도 안전가옥에는 꼭 가봐야겠다 마음먹었다.
"옷 두껍게 입고 왔네? 패딩이라도 벗어. 우리 더운 나라 갈 거니까"
"ㄴ..네 잠시만요 네?"
나침반을 꺼내 드는 공룡은 잠뜰은 막으려 했지만 이미 그들은 흰 빛을 내며 서울 한복판 여로고등학교에 존재하지 않았다.
"싱가포르..잖아"
졸지에 둘과 함께 순간이동 되어버린 잠뜰은 혼이 나간 얼굴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아니, 갑자기 이렇게 순간이동 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에요? 야, 우리가 다 계획이 있어. 여기 기억 나지? 공룡은 웃었다. 얄밉게 씩 웃는 공룡에게 잠뜰은 순간 한 대 때릴까 고민했지만 주변을 둘러보고는 손을 내렸다.
"옛날에 왔던 곳..이잖아요"
"그럼, 우리가 동아리에서 마지막으로 왔었던 곳이지"
두 팔을 허리에 얹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덕개에, 잠뜰은 덩달아 피식 웃었다. 추억이 참.. 많은 곳인 건 사실이었으니까.
셋은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싱가포르의 시끌 벅적한 거리를 걷다 어느새 그렌드 케니언으로 이동해서는, 그곳에서 낙하산을 타고 날았던 추억을 회상하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오래간만에 본 거대한 협곡은 어느새 그 사이사이에 깃든 노랑빛 추억 때문이였을까, 정말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한 번 더 낙하산을 타고 싶지 않냐는 말에, 격하게 고개를 저은 잠뜰은 그냥 그 주변을 걸으며 추억을 만끽했다. 어디선가 달콤한 향내를 싣고 온 오후의 바람만큼이나 달달하고 따스한 시간이였다.
선배. 이제 어디 갈 거예요? 어디긴 어디야. 우리 맨 처음에 갔던 곳이지. 공룡이 주섬주섬 나침반을 꺼내 들자 잠뜰이 물었다. 파리? 잠뜰은 잠깐 생각하다가 기억이 났다는 듯 검지손가락을 올리며 말했다. 정답~! 공룡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셋은 이동했다.
파리, 그래 파리. 그들이 가장 처음 왔던 곳이였다. 이게 얼마 만인지. 잠뜰은 황홀한 표정으로 아름다운 거리를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시차때문에 이제야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해 질 녘의 파리는 그 어떤 도시보다 아름다웠다.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고철덩어리가 그토록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야..파리가 역시 좋긴 좋다. 그렇지?"
"..그렇네요"
"그때 생각난다..너 막 우리한테 어떻게 한 거냐고 난리 쳤잖아"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걸요"
셋 사이에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 사이에 해는 점점 저물어 구름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골든 타임. 황금빛 시간 같았다. 추억으로 물든 그날 저녁은 그들이 파리에 있기 때문이 아닌, 파리에 그들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웠다.
"이제 돌아가요"
"뭐..그래야겠지? 정공룡 나침반 꺼내 봐"
"엄..그래 해도 다 졌으니까 돌아가는 게 좋겠다."
공룡은 항상 하던 것 처럼 나침반을 넣어놓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손에 잡힐 나침반이 그때만큼은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어..? 공룡의 입에서 불안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야..야 설마 아니지?"
그때,
"공룡학생"
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
"나침반도 이렇게 흘리고 다니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몰래 파리까지 오는겁니까.."
"국장님? 아니 그 아니.."
"잠뜰학생도 있었네요.. 일단 돌아가서 얘기하죠"
돌고 돌아 다시 여로고등학교 정문. 한국은 여전히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갑갑한걸 어째요.. 우리도 나가서 바람좀 쐬고 그래야 살죠"
당돌하게도 말대꾸부터 나오는 공룡에 각별은 잠깐 한숨을 쉬었지만 이내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일단 우리는 다시 가봐야할 것 같은데"
"그래, 빨리 들어가요. 안녕 잘가~~"
서둘러 공룡과 덕개의 등을 떠미는 잠뜰에 못 이겨 결국 등을 돌려 떠날 채비를 했다.
곧이어 흰 빛을 내며 사라지는 셋을 향해 잠뜰이 작게 무언가 중얼거렸다.
"너 그거 들었어?"
"잠뜰이가 말한 거?"
"어"
"그럼, 들었지. 겨우 들을 수 있었네"
"오늘 즐거웠어요"
Written by. 베타
Drawn by. 누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