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FOLD
YOUR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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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


“나 졸업여행 가고 싶어, 라더야.”

흰 천이 사락였다. 하늘에서 붉은 구름이 콸콸 쏟아져 내렸다. 항성이 채 떠오르지 않아 어둑어둑했던 그 새벽의 사이로 차가운 이슬이 끼어들었다. 분위기가 냉랭했다. 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아주 꿋꿋이 그의 눈앞을 차지했던 잠뜰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조금은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앳되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그의 시각을 점령했다. 갈색의 긴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렸다. 세계의 주축이 일그러졌다. 와그작.

그 아이, 잠뜰은 재작년 겨울에 사라졌다.

떠오르는 여명을 그대로 만끽하며 잠뜰은 유유히 서 있었다. 직진하던 빛이 당연하다는 표정을 띠며 그녀의 몸을 지나쳤다. 그녀의 발치는 태양을 박아넣은 듯 밝아왔다. 무수히 많은 광자가 바닥을 어둡게 물들이던 그림자의 존재를 그녀의 세계에서 삭제하고 있었다. 라더는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이 현재 이 세계의 어딘가에 실재하는 인물인지, 정말 그의 앞으로 찾아온 것인지, 아니라면…, 제가 귀신을 보고 있는 것인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근본적인 물리 법칙과 통념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마치 생자가 아닌 것처럼. 해당 장소의 존재자가 아닌 것처럼. 붉어오는 주변의 광경이 스산히 펼쳐졌음에도 그녀의 몸뚱어리는 어렴풋한 일출 사이에서 제 몸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흔들리는 가만 동공을 그대로 내비쳤다. 밝아오는 햇살에 동공이 차지하고 있던 면적의 넓이가 주욱, 줄어들었다. 붉은 눈동자에 깊은 구멍이 생겨났다. 끝을 알 수 없이 아득하고 어둑한. 그러자 그녀는 그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그 어떤 고난도 그녀를 피해 갔다는 듯이, 순수할 따름이었다. 영롱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잠뜰의 창백한 뺨을 바라보며 그 당시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라더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래, 가자.”

말했다. 조금은 길어진 그의 몸 아래로 검은 인영이 비쳤다. 어둠은 그의 형체를 삼키었고, 지면 위에 그 잔상을 뱉어내었다. 그림자가 기일게 늘어졌다. 습하던 새벽의 공기에 아침의 햇살이 가득 쏟아졌다. 뽀송뽀송한 빨래처럼 갓 샴푸를 털어내고 물을 쏟아내었던 라더의 머리칼에서는 시원한 바다의 향이 흘렀다. 금방이라도 옅은 파도가 밀려 칠 것 같았다.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빵빵.

급박히 쉼표를 찍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여행이 우연히 주어졌던 기적의 순간과 함께 다시금 시작되고 있었다. 책갈피를 집어들고, 다시금 페이지를 넘겼다. 그녀의 허여멀건한 귓가로 소년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 소리가 조용하게 울려 들었다. 가는 이어폰 줄이 진동했다. 조명도, 곡조도, 배경도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중단되었던 베스트 작품의 연재가 주인공의 귀환과 함께,

재개되었다.

-

그들은 치기 어린 눈빛으로 제주행 비행기의 티켓을 끊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떠나는 여행이었다. 두 친우는 차마 대한민국을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 판단하였기에, 그들의 범주에서 그나마 관광지의 영역에 속해있던 지역. 바로 제주도를 선택했다. 비행기를 타고 성층권을 넘나들어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드드드드, 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바퀴를 내렸다. 굉음과 함께 바닥의 마찰 부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열이 올랐다.

날카로운 바람이 시리게 라더의 귓가를 스쳤다. 붉어진 귀가 겨울을 읊조렸다. 건조한 나날들이 라더의 검은 패딩을 툭, 툭 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연주했다. 물은 세상을 순환하며 그 모든 기억을 간직한 채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 전생을 기억하던 이가 흰 가루가 되어 하늘을 나렷다. 눈 결정의 조각조각이 라더의 앞머리에 슬며시 내려앉았다. 조심스럽게 그의 흉터를 쓸어내렸다. 공항 앞 도로에는 염화칼슘의 잔해들이 가득이 남아있었다. 그 더미들은 눈으로서 제 형태를 유지하기도 하고, 물이 되기도 하고, 얼음이 되기도 하며 제각각의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그 자신과 잠뜰도 그랬다. 분명히 같은 나날을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같은 순간을 기억하고, 같은 순간을 즐기며. 그러나 그 사건으로 그와 그녀의 인생은 나뉘었다. 그 겨울날의 운명은 모두의 일상을 뒤바꿔놓았다. …의 대상을. 그에게로.

한참을 앓고 나서야 병상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던 그녀는, 모두가 시선을 돌린 새에 재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병원의 협탁 위에 놓인 이어폰 따위가 한 사람이 그곳에 존재했었다는 증거를 전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옆에 달랑 쪽지 한 장만을 남겨놓은 채로 새로운 인생을 찾아 달려나갔다. 그렇게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사실이었던가. 그 사람의 곁에 존재하던 모든 이들을 버리고 떠났어야 할 만큼, 절망적인 사고였던 것일까. 라더는 사라져버린 잠뜰의 자취를 정신없이 헤집으며 그 생각을 머릿속의 푸른 하늘에 송송히 박아 올렸다. 원망스러웠다. 끝없는 감정이 그의 사고를 적셔왔다. 한참을 숨 가쁘게 뛰어다녔던 탓에, 캔버스의 얇은 밑창을 타고 그의 굴곡진 발바닥에 뭉툭한 아릿함이 전해져 왔다. 흰 양말이 붕대처럼 그의 흰 발목을 짙게 감았다. 하늘에서 싸라기눈이 주르륵 내려대었다. 물이 울고 있었다. 함박눈이 울고 있었다. 그제야 그는 주저앉았다. 어떠한 체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대충 바닥에 쌓인 눈을 치우고, 다리를 굽혀 앉았다.

그리고, 흰 쪽지를 펼쳐 들었다.

오직 한 마디만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수 있었던 어휘는 세 음절에 불과했다.

“미안해….”

그래. 그렇게 급작스레 이별했던 사람이 지금은 그의 옆자리를 지키며 올해의 겨울과 이별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함박눈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얀색. 하얗게 물들었다.

“어디 갈까.”

라더는 물었다. 눈앞의 풍경처럼, 정말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2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갑자기 나타난 잠뜰, 그녀의 머리 위에는 눈이 내려앉지 않았다. 그냥 이질적으로 찰랑거릴 뿐. 쏟아지는 눈의 결정 사이로 갈색 실타래가 아름답게 흩날렸다. 그녀의 창백한 귀 끝은 미묘하게도 진동하고 있었다. 여행의 설렘일까, 이별의 불안일까. 그래서 소년은 저물어가는 겨울의 끝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앗아가지 말아 달라고. 겨울을 닮았던 그 아이를 지켜 달라고.

“…스케이트 타러 갈까?”

저번에 재밌게 탔던 거 같은데. 잠뜰이 웃음을 지었다. 하늘의 태양이 조금씩 고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바닥을 드문드문 뒤덮고 있던 눈이 따스한 햇볕 아래 스러져갔다.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

아니, 그걸 엎어지면 어떻게 해!
‌
잠뜰이 빽, 소리를 질렀다. 라더의 손바닥이 시린 얼음을 만나 붉게 달아올랐다. 상피 조직의 사이사이로 물 분자 하나하나의 서늘한 감각이 피부를 칼날로 꽈악 찔러대듯이 파고들었다. 그는 얼음을 짚고 일어나려고 하였으나 다시금 자리에 주저앉을 뿐이었다. 그 광경을 잠시 어이없게 바라보던 그 소녀는 친구에게 손을 기꺼이 건네었다.

“일어나!”

장난스러운 어조였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녀의 가벼운 말투였다. 훅,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내가 이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라더는 고여오는 슬픔의 조각을 꽁꽁 눌러 감춘 채 그의 눈앞으로 내밀어 진 손을 쥐어 잡고, 일어섰다. 손목도, 다리도, 얼굴도 겨울의 냉기에 으스스하기 시려 왔지만 맞잡은 손만은…, 따스했다고 할 수 있었다. 오직 그것 하나 만은, 따뜻했다.

라더는 다시 발을 내질렀다. 앞으로 스윽 미끄러졌다. 얼음이 은빛의 스케이트 날에 길게 갈려 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잘게 부서진 가루가 하늘을 동경하여 허공을 향해 튕겨 올랐다. 그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났다.

“…라더야, 바나나 우유 걸고 내기할래?”
“어디까지.”
“저기.”
“콜.”

몇 년 전의 일상이 그들의 현재로 훌쩍, 건너왔다. 그들의 과거에 죽음이 없었던 것처럼 활발하고, 또 활기찼다.

-

아…, 진짜 그건 사기지.

넌 스케이트 원래부터 잘 탔잖아. 라더가 진심을 담아 가볍게 투덜거렸다. 결국, 내기는 라더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월등히 앞서나가는 그녀의 발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러다가 꽝. 넘어졌다. 유유히 결승점의 벽과 하이파이브를 나눈 뒤 고개를 돌린 잠뜰은, 그녀를 노려보고 있던 라더의 불퉁한 표정을 목도했다. 그녀는 손가락질을 하며 설렁설렁하게 발을 휘적였다. 그래. 그녀는 물속을 유영하는 한 마리의 고래를 닮았다. 저 굳게 짓눌린 입술 하며, 동그란 눈 하며. 그리고 특히…,

“라더야! 우유도 좀 먹게 잠깐 쉬자.”

저렇게 말하며 그의 등판을 때리던 그 손까지. 고래가 지느러미를 크게 휘두르기라도 한 듯 타격 부위가 굉장히 아려왔다. 잠뜰은 얼음판을 벗어나며 아직도 바닥과 인사를 나누고 있던 라더에게 빨리 오라는 것처럼 손을 휘휘 흔들었다.

“하여간 손은 매워서….”

같이 가. 라더가 그녀를 바라보며 또박또박하게 읊조렸다. 슬며시 그를 쳐다보던 그녀는, 웃었다. 환하게.

“라더야, 사진 찍을까?”

그녀는 노오란 바나나 우유 빨대를 물고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잘근잘근 씹힌 빨대였지만 잇자국이 남지는 않았다. …라더는 굳이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그 어떠한 후회도 없이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끝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현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일까.

둘 중 어느 쪽이라도, 라더는 그가 또다시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로 다짐했다. 수없이 문질렀던 그녀의 쪽지 한 장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래.”


…그때처럼.

-
두 명은 두 번째 장소로 해변을 택했다. 스케이트를 그리 오랫동안이나 탔던 것인지, 어느새 태양은 재빨리 하늘의 활주로를 달려 결승선의 문턱에 도달해 있었다. 수평선과 닿을 듯 말 듯 한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던 하루의 상징이 제공한 영향을 받아들여, 바다가 붉은빛으로 가득이 물들어 있었다. 잘랑 잘랑한 파도의 인사를 만끽하며 그들은 발을 가리는 모든 것을 거두고 물 위를 걸었다. 겨울이었다. 한기가 그의 몸을 가늘게 휘어 감았다. 그냥, 발은 붉게 달아올랐으나 통각이라고 할 만한 무언가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몇 분을 걸었을까. 태양이 완전히 자취를 감출 듯 그들을 빼꼼히 쳐다보며 미련을 남기고 있었다. 그림자가 다시 한번 길게 늘어졌다.

“안 추워?”

잠뜰이 라더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말의 피하에서 그는 덧칠된 망설임을 보았다. 그녀의 눈가가 잘게 주름을 지었다가, 다림질을 한 듯 눌러 펴졌다. 잠뜰이 바라는 부분이 있을 때 항상 저도 모르게 꺼내오는 버릇 중 하나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만 돌아가는 것을 원하는 성 싶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원하는 답을 만들어 내었다. 손을 까만색 패딩 주머니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좀 춥네. 겨울이라서 그런가.

“그러면 이만 갈까?”

태양이 저물었다. 태양의 대체재로서 밤을 환하게 밝히던 달이 조심스럽게 제 머리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 낮과 밤의 경계선을 아슬히 걸어가며, 그녀는 답지 않게 다급한 말투를 사용했다. 말에서 조급함이 느껴졌다.

“…어. 공항으로 가자.”

그 전에, 사진 하나만 찍고. 이번에는 라더가 그녀를 향해 제의했다. 색이 조금 바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엉망이 되었던 앞머리를 툭, 툭 정리했다.

“사진 못 찍어도 난 모른다.”

“ㅋㅋㅋㅋㅋ알겠어ㅋㅋㅋㅋㅋ”

누군가가 불같은 영감을 받아 발명해내었던 기계의 처리 과정으로, 그들은 순간을 영원으로 변화시켰다. 번들거리는 종이 위에 잉크를 수놓아 그림을 그려내었다. 누구보다도 환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있는 소녀와 입꼬리를 스윽 끌어올리고 있는 소년이 그 그림의 등장인물이었다. 곧 고등학교의 울타리를 떠나 사회를 향해 나아갈 사람과,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사람.

-

라더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두 장이 한 장이 되었다. 올 때는 두 사람 몫의 값을 결제하였던 카드가 이제는 그 절반만을 빼앗긴 채 싱글벙글, 웃음 짓고 있었다. 라더는 제 휴대폰으로 날아온 출금 내역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원한 일이었다. 잠뜰은 라더에게 말했다.

“…서울 가는 표는 네 것만 끊으면 돼.”

나는, 남을 거야.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하였던 전개…, 였다. 그래. 급작스럽게 찾아와서는 졸업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이 추억을 쌓고 난 뒤에는 다시금 제가 있어야 할 곳을 향해 나아가야만 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그의 앞에서 아무런 티끌도 없이 맑게 미소 지을 수는 없을 테니까. …왜냐고?

“그리고, 라더야. 예담이 일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어.”

예담이한테는…, 내가 미안해야지. 너는 미안해하지 마. 넌, 그 아이에게 최고의 친구였어.

그렇게 말하며 머쓱하게 웃음을 툭, 떨구는 잠뜰의 얼굴에서 수심이 엿보였다. 갓 떠나왔던 바다의 향취가 그들의 코끝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를 온몸으로 만끽하며 잠뜰은 읊조렸다.

“나는 아니었겠지만….”

겨울 끝자락의 한적한 공항 안에서 그녀는 끝내 털어놓을 수 없었던 말을 쏟아내었다. 제 미안함과 머쓱함, 그리고 …억울함마저도 조심히 주섬주섬 끌어모아 활자의 형태로 아름답게 형상화했다. 마지막으로 하늘이 그들에게 제공했던 기회를 잡아채고서 그의 옛 친우를 향해 그 산물을 보내었다. 라더는 얼굴을 굳힌 채 그 어떠한 반응도 표하지 않았다. 코끝이 시린 바람의 타격에 쓰라려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사라졌던 건, …너에겐 미안하지만 내 꿈을 다시 한번 좇아보고 싶었어. 내 평생을 바치었던 활을 이제는 잡아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실 눈을 떴을 때 이전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어. 그냥, 눈을 떴는데 양궁이 하고 싶었어. 몇 년간 기대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는데…. 그래서 아무래도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으리라 나는 추측했고, 그 일으로 인해 내…, 결심을 확립하게 되었던 거야.”

그래서 나는 떠났어.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그녀는 잘 이어오던 말의 방향을 잃은 채 횡설수설했다. 얕게 깨물린 입술의 피부가 당혹을 드러냈다. 그 난잡한 문맥에도, 라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그리고 아이폰의 검은 케이스를 벗겨 내었다. 그 안에서 누렇게 변색되어 제 본 모습을 잃었던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수없이 꺼내보기라도 한 듯, 굉장히 너덜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물건을 마주한 잠뜰의 눈이 뜨여진 표면을 확장해 나갔다.

“…그래. 알아. 네가 이렇게 한 문장을 남기고 떠났으니까….”

다시 도전해보고 싶어, 라더야.

“우리는 너무도 어렸고, 그렇기에 서로를 빗나갈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나도 이제는 조금 편해지자.”

나도 네 환상을 보고 싶지는 않다. 그냥 이제, 웃으면서 그만두자.

죽음을 덧씌운 가면도, 환상을 덧씌운 인형의 몸짓도 이제는 보내주고 싶었다. 그냥 살아있다고 믿으며 앞으로의 축복을 빌어주고 싶었다. 이제는 서로를 원망하고 증오하는 기류가 스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들의 사이에서는 가혹한 세월만이 흐르고, 또 흘렀으니까. 이제라도 그 시간을 바로잡으며 올바른 운명의 실들을 엮어 인생이라는 천을 짜 내려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내리감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손에 들린 종이 한 장이 구겨졌다. 뒤에서 그녀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졸업 축하해, 친구.”

마지막 여행, 마지막 사진 속 마지막 한 명, 한 명의 발자국, 두 명의 온기.

마침표.

-
IF, 이세계 삼남매에서 마지막 여행 이후 잠뜰이 사라졌다면?




Written by. 유성
Drawn by. 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