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F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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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나고 부서졌다. 뭐가? 경화고 3학년 김준우가. 학교에서 공 차다가 다리부터 균열이 생기더니 모래가 가라앉듯이 가루가 돼서 산산조각났다. 그리고 김각별은 같이 공 차다가 이 광경을 두 눈으로 바라봤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등교하고 하교했던 친구 하나가 지금은 모래가 돼서 형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모래 속에 꽃 한 송이가 자랐다. 김준우를 양분으로 하듯이 인공잔디에서도 꽃이 자랐다. 김각별이 놀라서 운동장을 둘러봤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꽃 몇 송이가 인공잔디를 뚫고 자랐을 뿐이었다.



김각별이 손 덜덜 떨면서 김준우에게 다가갔다. 정확히 말하면 김준우였던 꽃에게 다가갔다. 꽃이 김각별을 바라보았다. 김각별은 그 작은 꽃에게 집어 삼켜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순간에 운동장은 정적에 가득 찼다. 방금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운동장에 아무도 없었다. 모래 가루와 꽃들이 김각별의 절망을 반겼다. 아무렇지 않게 학교 종이 울렸다. 학교 계단을 뛰어 올랐다. 3학년 A반 교실엔 아무도 없었다. 의자 위에도 꽃이 자랐다. 3학년 B반도. 교무실도.



김각별은 급하게 3학년 교실의 모든 문을 열어젖혔다. A반부터 E반까지 전부 열어젖혔는데도 제대로 살아있는 애가 아무도 없었다. 전부 꽃으로 살아 숨 쉬거나 모래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3학년 E반 3번. 김각별은 자기 자리에 앉았다. 열린 창문으로 더운 바람이 들어왔다. 에어컨 잔뜩 틀어둔 교실과의 이질감이 선명했다. 8월 한낮의 태양빛을 받는 나무가 흔들리고 블라인드가 흔들렸다. 김각별의 검은 머리칼이 흔들리고 의자 위에 모래가 한 알 한 알 흩날렸다. 김각별은 생각했다. 이 모래들은 전부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w. 빙빙 d. 오월







김각별은 절망에 빠져있었다. 3학년 E반 친구들이 바람 때문에 싹 다 섞였다. 이런 모래 한 알로는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교실은 모래투성이로 엉망이 됐고, 흙 하나 없는 의자에서는 꽃이 자랐다. 뽑히려고 해도 뽑히지 않게 아주 단단히 뿌리내렸다. 흰 꽃. 파란 꽃. 빨간 꽃. 무채색의 교실에다가 물감을 흩뿌려 놓은 것처럼 색이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 김각별은 자리에 앉아서 종말을 기다렸다. 곧 있으면 모래가 될 텐데. 김각별이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즘에 교실 뒷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살아있어요? 붉은 머리가 김각별에게 물었다.



노란 명찰에 적힌 서라더 이름 세 글자. 머리는 새빨갛고 넥타이는 다 풀어헤친 채로 말했다. 서라더는 누구와는 달리 끝까지 살아남겠다고 학교 전부 돌면서 생존자를 찾았다. 교실 문 하나씩 열 때마다 절망하다가 마지막으로 만난 게 김각별이었다. 1층부터 4층까지 전부 다 돌았는데 살아있는 게 저희밖에 없어요. 서라더가 그렇게 말하는데도 김각별은 빤히 쳐다보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선배? 서라더가 되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선 천천히 입을 떼서 하는 말이 그것이었다.



너 양아치냐?

예?

너 양아치냐고.

갑자기 그게 무슨 개소리에요 선배.



서라더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김각별은 꽤 진지했다. 머리가 새빨간데. 설마 자연이야? 지금 상황에서 그런 소리가 나와요? 너는 꽃이 되면 빨간 꽃이 되겠다. 김각별은 실없는 소리를 했다. 자꾸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일단 빨리 학교 밖을 벗어나야죠. 핸드폰 보니까 밖도 다 그런 것 같긴 했지만. 서라더는 김각별을 재촉했다. 너 핸드폰도 안 냈어? 진짜 양아치네. 서라더는 교무실에서 꺼내온 거라고 반박할까 하다 그냥 내버려 뒀다. 어차피 뭔 말을 해도 듣질 않는데. 그냥 그러고 말았다.



그냥 여기서 죽지 뭐. 8월 한낮에 김각별은 희망찬 목소리로 절망을 얘기했다. 전 여기서 죽을 생각 없는데요. 어쩌라고. 아니 지금 저희 둘 밖에 없다니까요? 그게 뭐 어쩌라고. 서라더는 한숨 한 번 쉬고 말했다. 여기서 혼자 평생 사실 거에요? 김각별은 답했다. 어차피 곧 있으면 죽겠지. 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서라더는 더 이상 김각별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둘은 앞뒤 자리에 앉았다. 텅 빈 학교엔 둘 뿐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교실에 모래바람만 불었다. 김각별은 콜록거렸다. 둘 다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대화는 하나 없었다.



오후 네 시였고 하교 종이 쳤다. 하교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종은 잘만 울렸다. 서라더는 뜬금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혼자 가기는 민망한 건지 김각별에게 물었다. 저 매점 갈 건데 선배 안 가실래요? 김각별은 급식 째고 공 찼더니 배가 고팠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라더랑 나란히 2층 매점으로 향했다. 서라더는 초코우유를 골랐고. 김각별은 커피우유를 골랐다. 커피우유는 안 써요? 초코우유는 안 다냐? 의미 없는 티키타카가 오갔다. 사실 누구 하나 당장 모래가 될지도 모르긴 했지만 일단은 지금 당장의 이 평화를 즐겼다.



서라더는 매점 아주머니 대신 모래 한 가득과 분홍색 꽃이 피어있는 자리에 잔뜩 구겨진 이천 원을 얹어두었다. 초코우유 천 원, 커피우유 천 원해서 이천 원이었다. 돈 안 내도 아무도 뭐라 안 할 텐데. 김각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일단은 얹혀 먹는 꼴이니 입 다물었다. 어쨌든 나한텐 이득이니까. 양아치 후배가 돈 날리든 뭐든 본인 알 바는 아니었다.



선배는 그럼 학교에 계속 있을 거예요?

집으로 가야지.

저는 일산으로 갈 거예요.



같이 안 가실래요?

서라더는 초코우유에 빨대 꽂고 마시면서 물었다. 그럴까. 커피우유처럼 씁쓸한 답변이었다. 그럼 그래요. 둘은 걸었다. 교실에 놓고 온 가방은 챙기지도 않았다. 어차피 가방에 들어있을 거라곤 수능특강 정도겠지. 열여덟살과 열아홉살의 생각들은 전부 충동적이었다. 무작정 학교 밖으로 걸었다. 걸어서 여행을 떠났다. 학교 뒷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지금이 저녁 여섯 시였다. 원래 이 시간이면 닫혀있어야 할 텐데. 수위 아저씨도 모래가 되셨나. 김각별은 대충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왜 하필 일산이야. 일산 호수공원에 생존자가 있다는 커뮤니티 글을 봤거든요. 아까 하도 핸드폰 만지작거리던 게 뭔가 했는데 그거 보느라 그랬구나. 아뇨 그건 선배랑 있기가 어색해서. 이상하지만 이어지긴 하는 대화가 계속됐다. 그래서 어디로 걸어야 되는데? 김각별이 서라더에게 물었다. 서라더는 한 손에 핸드폰 들고 걸었다. 선배 길치죠? 너는 얼마나 잘 알길래. 서라더도 일산까지 걸어본 적도 없으면서 손에 네이버 지도 들고 있다고 허세 좀 부렸다. 선배보단 잘 알겠죠.



아스팔트를 쭉 걸었다. 차에는 몇몇 차가 멈추어 서 있었다. 마치 무슨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게 그대로였다. 차 창문으로 넘겨 본 운전석에는 모래 한 더미들만 가득했다. 그리고 그런 중간에도 피어있는 꽃이 너무 이질감이 들었다. 멈춘 시간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은 누군가의 생명을 양분으로 했다. 고속도로의 중앙선을 걸었다. 아스팔트를 뚫고 자란 꽃들이 가득했다. 바람이 불었다. 모래가 시야를 가렸다. 눈에 모래 들어가는 것 같아. 김각별이 투덜댔다. 걍 닥치고 좀 걸어요. 서라더가 답했다.







덕양구에서 일산동구까지는 꽤 걸렸다. 네이버 지도 말로는 버스 타면 삼십 분일 거리를 걸어서는 두 시간 가야 한다고 했다. 물론 서라더 체력으로는 두 시간 걸렸겠지만 김각별 체력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걷고 쉬고 떠들고 하니까 반 밖에 안 왔는데 여덟 시였다. 김각별은 땀 줄줄 흘리면서 말했다. 조금만 쉬었다 가자. 김각별이 24시 편의점 앞에서 말했다. 서라더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편의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3인데 체력이 이렇게 없으면 공부 어떻게 해요? 나 예체능인데. 아.



에어컨 빵빵한 편의점에서 물건을 싹 다 털었다. 김각별은 평소엔 비싸서 먹지도 않는 오천 원짜리 치즈함박스테이크를 먹었다. 일 리터짜리 사이다를 천 원짜리 종이컵에 따라 먹는 사치까지 부렸다. 진짜 법 없으니까 막사시네요. 서라더가 김각별에게 말했다. 여행가는 김에 사치도 부리고 그러는 거지. 선배 저한테 진짜 갚으셔야 돼요. 서라더는 그렇게 말하고 핸드폰 케이스에서 만 원을 꺼내 올려두었다. 서라더는 오지랖이 넓었다. 김각별은 극도의 이기주의였고 말이다. 돈 내면 누가 알아주냐? 서라더는 대답이 없었다.



서라더와 김각별은 정처 없이 걸었다. 아무리 8월이지만 밤은 선선했다.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비 냄새도 선명했다. 난 왜 모래가 안 될까. 김각별이 서라더에게 물었다. 그거 알면 이미 알려드렸겠죠. 서라더가 당연한 말로 대답했다. 너도 모래가 되면 어떡하지. 김각별이 또 서라더에게 물었다. 서라더는 대답이 없었다. 그냥 걸었다. 김각별도 굳이 더 묻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서라더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래도 선배는 살아야죠. 서라더는 끝까지 오지랖이 넓었다.



일산 가면 사람 있어?

설마 한 명도 없겠어요.

핸드폰 켜서 소식 좀 봐봐.

핸드폰 아까 배터리 다 나갔어요.



절망적이네. 김각별은 그렇게 말했다. 이 상황이 전체적으로 절망적이긴 했다. 하늘은 어둡고 별 하나 없었다. 별들도 다 모래된 거 아닐까. 그러면 그거 다 지구로 떨어지는 거 아니에요? 너 통합과학 안 들었냐? 저 문과라서요. 뭔 개소리야. 서라더랑 김각별은 무서워서인지 외로워서인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듯이 자꾸 말을 걸었다. 지구에 우리밖에 안 남았나 설마.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세요. 서라더는 모래 돼서 파묻히는 것보다도 혼자 남는 게 백 배는 더 무서웠다. 혼자서 어떻게 살아. 이 넓은 지구에서 어떻게 나 혼자 살아. 서라더는 그렇게 생각했다.



김각별은 그 정반대였다. 죽는 게 제일 무서웠다. 아까는 어차피 죽을 거 가만히 있겠다고 했었는데 그거 다 거짓말이었다. 살고 싶어서 3학년 교실 문 다 열었었고. 살고 싶어서 일산행에 동참했다. 이 세계에 나 혼자 살아도 절대 죽지만은 않고 싶었다. 김각별은 원색적인 사람이었다. 깊은 절망이 닥쳐오자 선명한 욕망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서라더는 그걸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 다 똑같지 뭐.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정적 속에서 한참을 걸었다. 아파트 단지 사이를 걷는데도 너무 조용해서 진짜 멸망한 것 같았다.



나 인생 살면서 바다 한 번도 안 가봤어.

선배는 왜 자꾸 뜬금없는 타이밍에 말을 걸어요?

말 걸면 안 되냐?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좀 뜬금없잖아요.

죽기 전에 바다 한 번 못 간 게 아쉬워서 그래.

그런 걸 아쉬워하는 성격인지 몰랐죠.

한 번 사는 인생 본전을 뽑아야 된다고.



김각별이 아까 편의점에서 털어온 커피우유를 마시면서 이야기했다. 역시 선배는 선배네요. 서라더가 헛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일산에 바다 없어요? 있지 않나? 서라더가 그렇게 말했다. 김각별은 무지함에 감탄하면서도 그냥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별 말 하지 않았다. 호수의 이름을 바다로 하면 바다가 아닐까. 본질은 비슷하니까. 김각별은 어쨌든 대충 그렇게 합리화했다. 개소리였다. 둘은 경기도 한복판에서 바다를 찾았다. 그런데도 둘 다 딱히 잘못된 건 느끼지 못했다.







다시 한낮이었다. 8월 오후의 날씨는 언제나처럼 뜨겁다. 아스팔트가 녹아버릴 것 같은데도 도로 군데군데 꽃들은 더욱 생기를 보였다. 이 다리 건너고 횡단보도 건너면 곧 일산이었다. 이십 분만 걸으면 이 희망고문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군데군데 핀 꽃들과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들이 가득했다. 진짜 여행 가는 것 같다. 김각별이 그렇게 말했다. 여행을 하루 동안 뼈 빠지게 걸어서 가는 사람이 어딨냐고 말할까 하다가 서라더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신했다. 저 사람이랑 부딪혀서 좋을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야 양아치. 김각별이 서라더를 그렇게 불렀다. 왜요. 아무것도 없으면 어떡할 거야? 그냥 살아야죠. 서라더는 그렇게 대답했다. 아스팔트의 중앙선을 걸었다. 도로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노란 선을 밟으며 뛰었다. 정말 모든 게 그대로 멈춰있었다. 바람 불면 나무가 흔들린다. 손목시계의 초침도 흘렀다. 모래를 손에 한가득 들고 떨어뜨리면 그대로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차들은 전부 멈춰 서 있었다. 서라더는 괜히 이질감이 들었다. 왜 자꾸 이렇게 공허한 기분이 들까? 서라더는 그냥 8월이라서. 8월이니까 그렇다고 하기로 했다.



다리를 건넜다. 일산이었다. 줄 서 있는 아파트와 상가들이 눈에 띄었다. 딱히 덕양구와 다를 건 없었다. 웨스턴돔으로 걸었다. 진짜 얼마 안 남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왜 심장이 빨리 뛰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여름이라서 그랬다고 하기로 했었다. 너무 덥고 뜨거워서인지 눈앞도 잘 구분하지 못했다. 여행의 목적지가 눈 앞이었다. 길거리 표지판에 적혀있는 호수공원이라는 글자가 잔뜩 흐려 보였다. 서라더가 달렸다. 야 양아치! 같이 가! 김각별이 뒤에서 서라더를 불렀다. 서라더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을까? 그것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서라더는 호수공원 한 가운데에서 멈춰 섰다. 김각별도 서라더를 따라 달리다 천천히 속도를 낮췄다. 이게 뭐야? 김각별이 서라더에게 물었다. 희망찬 표정이었던 서라더를 다시 바라봤을 때는 공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래가 잔뜩 뭉쳐있었고. 꽃은 방금 피어난 듯이 생기로웠다. 사람들이 산산조각 부서진 것은 서라더가 도착하기 불과 5분 전에 일이었다. 도착하기 5분 전. 서라더가 호수공원에 도달하기 바로 직전에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산산조각 부서졌었다.



누군가가 틀어놓았었던 라디오가 지직거렸다. 서라더는 라디오를 던져서 깨부숴버렸다. 정적이 흘렀다. 수없이 많은 꽃들이 호수공원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모래들이 서라더의 시야를 가렸다. 셀 수도 없이 형형색색한 꽃들로 전부 채워진 공원에는 서라더와 김각별만 절망한 채로 서 있었다. 김각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라더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한 공원에는 꽃 냄새와 물 냄새가 났다. 서라더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느리게 입을 뗐다.



선배.

저희 이제 어떻게 살아요?



서라더가 덜덜 떨면서 말했다. 그런데도 웃는 표정이었다. 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모래가 잔뜩 휘날렸다. 김각별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떻게 말해야. 어떻게 말해야 할까? 김각별은 할 수 있는 말을 몇 개씩 고르고 있었다. 그래놓고 생각해낸 말이 고작 그런 거였다. 괜찮아. 여긴 바다잖아. 잔뜩 고여있는 호수를 보면서도 김각별은 바다라고 했다. 파도 하나 치지 않는 호수를 바다라고 불렀다. 김각별은 이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서라더는 눈물은 흘리면서도 살짝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여기가 어떻게 바다에요 선배. 또 경기도 한복판에서 바다를 찾았다.



김각별은 더 생각하기 싫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김각별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모래 있고 바다가 있으니까 이곳은 해변이라고 합리화했다. 어쨌든 본질은 같으니까. 김각별은 꽃밭에 누워버렸다. 서라더도 모르겠다면서 그냥 그 꽃밭에 따라 누워버렸다. 사막처럼 느껴지는 모래의 건조함이 등에 닿았다. 까슬한 모래와 꽃의 향기가 가득했다. 저희 이제 어디로 갈까요? 이제 진짜 바다로 여행을 가자. 거기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김각별은 문장에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었다. 이어지는 문장엔 단어 대신 호흡이 가득했다.







눈을 떴다 감았다하니까 밤이었다. 김각별이 몸을 일으켰을 때는 서라더는 잠도 없는지 넓은 꽃밭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었다. 달이 밝았다. 야 양아치. 왜요 선배. 나 졸려. 어쩌라고요. 편의점에서 커피우유 좀 사와. 미쳤어요? 김각별은 서라더보고 커피우유를 사오라고 시켰다. 남한테 시키는 거 보니까 본인이 더 양아치였다. 빨리 갔다와. 그리고는 서라더를 등 떠밀었다. 서라더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등 떠미는 김각별을 말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일단 편의점으로 향했다.



서라더는 편의점에서 커피우유를 골랐다. 빙그레 커피우유가 좋을지 스누피 커피우유가 좋을지 따위에 관해 고민했다. 서라더는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걸 왜 고르고 있어? 그런데도 그 나름대로 좋았다. 아직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났다. 하루에 하나씩은 마시던 것 같던데. 서라더는 혼자 고민했다. 커피우유 세 개를 봉투에 넣고 초코우유를 한 손에 들었다. 핸드폰 케이스에서 돈을 꺼내려 했다. 돈이 하나도 없었다. 아 그 선배 때문에. 서라더는 봉투를 들고 다시 꽃밭으로 향했다. 갔을 때는 돈 갚으라고 해야지.



어 양아치 왔냐. 평소의 김각별이라면 이렇게 말 했을 것이다. 아니면 커피우유 몇 개 사왔냐라며 물어봤을 것이다. 서라더는 김각별을 쳐다보았다. 김각별도 서라더를 쳐다보았다. 김각별의 손끝부터 아주 천천히 금이 가기 시작해서 이미 반절정도 균열이 진행된 상태였다. 더웠다. 밤인데도 너무 더워서 현실을 제대로 직시할 수가 없었다. 서라더는 이번엔 울지도 않았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아니죠? 서라더가 김각별에게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달빛이 모래에 닿아 부서졌다. 모래가 별처럼 보였다.



꽃밭 한 가운데에 둘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김각별의 몸 한 쪽이 이미 모래로 부서지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모래가 반짝였다. 바람이 아주 살짝 불었을 뿐인데도 김각별은 한 알씩 흩날렸다. 김각별의 검은 머리가 빛을 받아 흩날렸다. 김각별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환하게 웃고 있어서 서라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각별이 서라더를 보고 천천히 입을 뗐다. 양아치. 서라더는 대답했다. 왜요. 서라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김각별이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모래로 부서지는 채로. 꽃이 되어가는 채로 대답했다. 나 죽기 싫어.



선배는 진짜 끝까지 이기적이네요.

너는 끝까지 오지랖이 넓어.



서로에게 완벽한 구원이자 절망이었다. 둘뿐인 세상이었다. 의지가 된 것도 둘 뿐이었고.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도 결국엔 서로였다. 김각별은 마지막까지 위선으로 가득찬 말을 건넸다. 내가 없이도 살아남아. 김각별은 그 말만 하고 모래가 되어 완전히 부서졌다. 서라더의 대답을 듣지도 못한 채로 그랬다. 달이 밝았다. 아주 찬란하게도 밝았다. 그리고 서라더에겐 완전한 절망만이 찾아왔다. 모래들이 한 가득이었다. 마치 사막 같았다. 사막에서 꽃이 자랐다. 노란 샤프란이 자랐다. 서라더는 그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 모든 것의 상실이었다. 노란 샤프란의 꽃말은 청춘과 지나간 행복이었다.



서라더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 모래들은 전부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흩날렸다. 그리고 서라더는 혼자 결론내렸다. 전부 바다로 가고 있는 것 같아.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Written by. 서빙빙
Drawn by. 오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