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FOLD
YOUR DREAM
  • Home
  • Portfolio
  • About
    • Biography
    • Client
    • History
  • Contact

3, 2, 7


"얘들아, 우리 여행 가자."


3-5라고 적혀있는 팻말이 가리키는 중학교의 빈 교실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있는 네 명을 향해 덕개가 말했다. 여행? 갑자기? 순서대로 라더, 잠뜰이 물었다. 응, 졸업여행. 덕개가 답했다. 핸드폰 화면에 두 엄지를 신명 나게 두드리던 공룡이 시선은 화면에 고정한 채,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야,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웬일로 박덕개가 여행을 가자고 하냐? 그것도 졸업여행이라니."

"야 공룡, 덕개한테 왜 그래. 다음 주면 우리 졸업하잖아. 가자고 얘기할 수도 있지."

옆 반에서 자신의 가방을 챙겨 다섯 명이 있는 교실로 돌아온 각별이 공룡의 뒤통수를 탁 치며 말했다. 아, 왜 때려! 공룡이 뒤를 돌며 소리를 지르자 각별은 그냥이라며 덕개의 앞자리에 앉았다. 수현은 그런 공룡과 각별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고서는 책을 읽고 있던 라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우리 덕개님은 어딜 가고 싶은 건지? 손에 쥐고 있는 피크닉을 쪽쪽 마시며, 수현이 덕개에게 물었다.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 다섯 명의 눈치를 보던 덕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츠부르크. 풉-

"황수현, 피크닉 뿜지 마! 으 더러워."

"라더씨 쏘리, 여기 물티슈."

"그래 정말 고맙다."

"갑자기 웬 잘츠부르크? 우리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 안 했어, 고작 중학생이라고."

"그냥, 갑자기 가고 싶어서. 거기 호수가 그렇게 예쁘다는데."

잘츠부르크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핸드폰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물어보는 공룡에, 덕개가 대답했다. 그에 잠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예뻐서? 그게 다야?

"그리고 보통 졸업여행은 바다나 보러 가는 거 아니야? 여기서 갑자기 호수가 왜 나와."

"바다도 예쁜데, 호수도 만만치 않은걸? 그리고 호수는 계속 보면 고요한 느낌이 들어서 난 좋아. 해외라서 사람도 별로 없을 테고."

"덕개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덕개의 대답에 각별이 자리에서 일어나 헐렁해진 머리끈으로 자신의 긴 머리를 다시 고쳐 묶으며 말했다. 조용히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팔을 물티슈로 닦던 라더가 고개를 들어 덕개를 바라보며 물었다. 굳이 호수 하나 보러 해외까지 가야 해?

"우리나라에도 호수가 얼마나 많은데, 뭣 하러 유럽까지 가."

라더의 말에 덕개는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명색이 졸업여행인데, 해외라도 한번 가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해서 그들은 중학교의 졸업여행을 굳이 유럽까지 갔다, 잘츠부르크로. 호수는 여행의 마지막 날 저녁에 간 거라 날씨가 꽤 쌀쌀했으나, 다행히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날은 2월 7일이었다. 날짜가 그냥 예쁘게 생겼으니까, 예쁜 호수도 그때 봐야 한다면서 덕개가 무작정 정한 날이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구박받긴 했지만.

덕개가 가자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호수는 덕개의 말처럼 고요했다. 어쩌면 사람이 많지 않아서 조용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다. 호수의 푸른 빛과 섞여 잔잔하게 춤추는 듯한 물결을 구경하기 위해, 알록달록한 집들은 사이좋게 붙어 물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산들이 만든 길을 따라 호수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들의 생각보다 호수가 훨씬 크고 예뻤기에, 다섯 명은 춥다고 두 손을 호오 불면서도 여기까지 오길 정말 잘한 것 같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꺼냈다. 그럴때마다 덕개는 내가 뭐랬어, 라며 씩 웃어보였다.

호수와 주변의 풍경을 한눈에 담기 위해 그들은 난간에 기대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추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경치를 구경하느라 바빠서 그런 건지, 몇 분 동안 모두 말없이 서 있으니 수현이 정적을 깨기 위해 입김을 하아 뱉으며 살며시 말을 꺼냈다. 이렇게 다 같이 놀러 오는 거 오랜만이다.

"처음으로 대화 나눈 게 입학한 날이었나? 그때 하필이면 우리 여섯 명이 1분단에 앉았잖아."

"덕분에 이렇게 유럽까지 같이 올 정도로 친해진 거지, 뭐. 공룡이 그때 필통 안 날렸으면 어쩔 뻔했어."

"그 필통 하나 때문에 덕개가 나한테 먼저 말 걸어줬잖아. 뭐라고 했더라?"

"이거, 지금 나 가지라고 던진 거야? 고마워! 잘 쓸게~"

아 진짜 김각별! 말하지 마, 쪽팔리잖아. 찬 공기 때문에 분홍빛을 띤 덕개의 귀랑 양 볼이 더 붉은색으로 변했다. 춥다는 핑계로 얼굴을 가리려고 목도리를 더 위로 올려서 휙휙 감은 덕개는, 시선은 아래로 내려 저 멀리 호수에 비친 해의 잔상을 바라보았다. 방금 나눈 대화가 언제의 일인지 이제야 생각난 듯 뒤늦게 하하 웃은 라더가 자신의 팔을 덕개의 어깨에 두르며 말했다. 덕개 아니었으면 우리 그때 대화도 못 해봤을걸?

"누가 그렇게 재미없는 말을 했나 믿기지 않았었지만, 그래도 몇 분 만에 우리 다 친해졌잖아."

"맞아, 덕개 아니었으면 여행까지 같이 올 일도 없었어."

공룡의 말에 모두 그치, 라며 맞장구를 쳤다. 덕개는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한 건지 대답을 하지 않고, 여전히 일렁이는 호수의 표면에 비친 햇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아쉽다는 감정이 분명히 드러날 정도의 어감을 실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다, 이렇게 여섯 명 다 같이 있는 게.

"너 왜 그래, 다시 못 만날 것처럼 얘기한다?"

"덕개야 혼자 분위기 잡지 마. 어차피 졸업식 때 또 만날 텐데."

"그래, 그때도 우리끼리 놀면 되지!"

라더, 각별, 잠뜰이 차례로 말했다. 덕개는 호수에서 고개를 돌려 양쪽에 있는 친구들을 한 번씩 바라보고는, 입이 보이도록 목도리를 내려 씁쓸하면서도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우리의 인연은 마침표로 끝나지 않으니까."


덕개를 제외한 다섯 명은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게 잘츠부르크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며칠 후 중학교의 졸업식을 맞이했다. 다른 중학생들처럼 평범하게 졸업식을 보낸 그들은 덕개까지 포함한 여섯 명으로 남은 하루를 동네 놀이터에서 놀며 보냈다. 전부 같은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으니 연락은 절대 끊지 말자고, 꼭 자주 만나서 놀자고 다섯 명은 약속했다. 옆에 가만히 서 있던 덕개도 물론 당연하다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 그들은 덕개를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 이상으로 들성고등학교 제6회 졸업식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끝으로 사람들은 물 빠지듯이 순식간에 강당 밖으로 쓸려 나갔다. 인파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싶지 않아 자신의 자리에 한참이나 앉아있던 각별은, 몇 분 뒤 강당이 전보다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고 옆자리에 내려놓았던 꽃다발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내려가는 계단에서 보이는 창문 밖에는 저를 제외한 네 명이 추위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저기에 덕개도 있어야 하는 건데. 발걸음을 멈춘 각별은 밖을 바라보며 바람에 혼잣말을 날려 보냈다.




중학교 졸업식 이후 각별을 포함한 다섯 명은 덕개를 본 적도, 그와 개인적으로 연락이 닿은 적도 없었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 잠뜰이 담임에게 찾아가 물어보니 덕개는 전학 처리가 되었다고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다였다. 연락은 절대 끊기지 말자고, 자주 만나서 놀자고 약속까지 했으면서, 아무 연락 수단도 남겨놓지 않고 말없이 떠난 덕개를 그들은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체 톡방은 다행히 남아있어 생각날 때마다 방에 들어가 각자 카톡을 몇 개씩 남기기도 했다. 잠뜰이랑 수현이 장학금을 받게 되었을 때, 각별이 자취를 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라더가 전교 회장이 되었을 때도 대화방은 소란스러웠다. 수학여행이랑 수련회를 갔을 때 공룡이 몰래 찍은 네 명의 사진과 자신의 셀카 몇 장씩도 구석의 사진첩에 고이 담겨 있었다. 아무리 3년 동안 6명이 있는 대화방을 시끄럽게 채웠지만, 말풍선 옆에 있는 1 표시는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인 오늘까지도 덕개에게서 아무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박덕개, 너무하네. 언제는 인연이 마침표로 끝나지 않는다면서."

지난 3년간의 기억을 떠올리던 각별은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네 명이 생각나, 아차 하며 꽃다발을 한 손으로 꼭 쥔 채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 건물 밖을 나온 각별은 운동장 가운데에서 저를 부르는 잠뜰과 수현을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갔다. 김각별, 빨리 와!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계속 기다렸잖아!"

"맞아, 너만 여태까지 저 안에 있었어."

그러게 누가 계속 기다려 달래? 꽃다발을 라더에게 맡기고 핸드폰을 꺼내 검은 화면을 들여다본 각별이 앞머리를 쓱쓱 정리하며 말했다. 아, 얘는 기다려줘도 뭐라 하네. 공룡이 그런 각별의 등을 한 대 치며, 귀찮다는 듯 말을 뱉었다. 이 다섯 명의 부모님들은 축제가 시작하기 전, 서로의 아들딸들과 사진만 찍고 다시 제 할 일을 하러 모두 직장으로 돌아갔다. 고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하루는 친구끼리 보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다섯 명의 졸업생은 학교 옆에 있는 아파트의 정자로 가 동그랗게 둘러앉아 담요를 나눠 덮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졸업 선물로 뭘 받았다, 나는 어느 학과를 가게 되었다, 앞으로는 뭘 할 것이다, 등등. 시간이 지나 대화할 소재가 떨어져 모두가 말이 없어지자, 두 손으로 핫팩을 흔들고 있던 잠뜰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여행 갈래?

"이제 고등학교도 졸업했으니까, 오랜만에 졸업 여행 가야지."

"졸업 여행 좋다, 우리 다 같이 놀러 간 적 별로 없었잖아."

덕개랑 같이 갔던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라더의 말에 모두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왜, 내가 뭐 어쨌다고. 갑작스러운 시선에 라더가 당황하자 잠뜰이 깔깔거리며 웃고서는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가는 거야.

"잘츠부르크로."

"잘츠부르크로? 난 좋아."

"나도 좋아!"

저도 찬성. 당연히 가야지! 거기에 우리 추억이 얼마나 많은데. 제일 먼저 말한 수현을 따라 너도나도 좋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그들은 3년 전에 갔던 중학교의 졸업여행처럼, 고등학교 졸업여행도 똑같이 잘츠부르크에 가기로 했다.




잘츠부르크는 몇 년 만에 오는 곳이라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다행히 주변의 건물과 거리 등의 풍경은 그들의 기억 속에 있는 3년 전의 모습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덕개랑 같이 여행을 갔던 추억을 잠시나마 다시 떠올려 볼 수 있기 위해서, 졸업여행의 코스를 짜기로 담당했던 수현은 3년 전에 이곳으로 왔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 여행계획을 세웠다. 졸업식도 지났고 이 여행을 위해서 모두가 개인적인 일정을 비워두었다는 점을 고려해 여행 기간을 길게 잡은 덕분에, 다섯 명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여유롭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전날에 간 정원에서 너무 오래 있었다고, 덕분에 다리가 아프다며 일어나자마자 투덜대는 공룡에 수현은 한숨을 쉬며 오늘은 숙소에서 놀자고 했다. 길 건너편에 있는 작은 마트에서 과자와 콜라, 사이다를 사 온 잠뜰은 숙소로 돌아와 과자를 한 봉지씩 던졌고, 라더가 하나씩 받아 주섬주섬 열었다. 옆방에서 젠가를 가져온 공룡이 박스를 뒤집어 블록을 와르르 쏟았다. 아 정공룡, 뭐 해! 각별이 공룡을 한 대 치며 소리쳤다.

"쌓인 채 뒤집어야지, 바보야!"

"아 맞다, 미안."

미안? 이럴 거냐? 내가 뭐!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무시한 채 라더는 바닥에 널브러진 나무블록을 주워 차곡차곡 쌓았다. 중학생일 때도 자주 가지고 놀던 물건이라, 블록을 뒤집으면 각각 다른 낙서가 남아있는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박덕개 바보, 귀여운 우리 덕개, 덕개야 키 좀 커라. 예전에 네임펜으로 하나씩 끄적인 기억이 생각나 블록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라더는 세 개 연속으로 덕개의 이름이 적힌 게 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박덕개 보고 싶다. 젠가를 쌓다 말고 가만히 앉아있는 라더에게 다가온 수현이 그의 손에 들린 블록들을 보고 다시 뒤를 돌았다. 아, 그 젠가 진짜.

"괜히 또 생각나게 하네."

수현의 말에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잠뜰은 과자를 먹다 말고 옆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한손으로 들어, 지금까지 잘츠부르크를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덕개가 아직 있는 대화방에 보냈다. 라더의 손에 들린 젠가도 찍어서 같이 보내는 것도 잊지 않고. 옆에서 잠뜰이 뭘 하고 있나 구경하던 네 사람도 대화방에 한 마디씩 남겼다. 우리는 오랜만에 여기에 놀러 왔다, 놀러오니까 덕개 네가 생각이 난다, 한 번이라도 더 만났으면 좋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은 대화를 위로 올려보았지만, 마지막 대화였던 졸업식 당일에 보낸 메시지는 아직까지 1 표시가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날, 수현은 웬일인지 아침 일찍부터 다섯 명을 깨워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어디로 가냐는 공룡의 질문에 수현은 당연히 광장에 가야지, 마지막 날이니까! 라고 대답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점심을 피하려고 아침 일찍부터 나갔지만, 여전히 사람은 많았다.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야외를 피해 그들은 아직 조용한 편인 성을 구경하는 것을 먼저 택했다. 성 입구에서 입장권을 끊는 각별의 뒤에 서 있던 라더가 하늘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벌써 마지막 날이네.

"시간 되게 빠르다, 그치?"

"며칠만 있으면 또 일상으로 돌아가겠네."

잔돈을 거슬러 받던 각별이 대답했다. 수현과 공룡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리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아, 차라리 이렇게 계속 여행이나 다니고 싶다. 나도, 이제 돌아가면 할 일이 얼마나 많아질 텐데. 각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하하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여기 와서 추억 많이 만들어서 다행이야."

덕개가 없어서 아쉽지만. 각별이 말을 마치자 순식간에 다섯 명은 조용해졌다. 어제 덕개가 있는 대화방에 사진을 보낸 게 생각이 난 잠뜰은, 설마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켰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1 표시가 보이자 괜히 짜증이 나 핸드폰을 확 껐다.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변해버리는 화면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은 잠뜰이 조용히 서 있는 네 명을 지나쳐 성 입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얼른 안 와?

"빨리 들어가기나 하자, 뒤에 사람들 기다리잖아."

성을 구경하는 데 시간은 별로 걸리지 않았다. 다 둘러보고 나온 후 그들은 광장으로 향했다. 점심이 지난 지 시간이 꽤 됐는데도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분수대 앞에서 예쁘게 사진을 찍으려고 서로 기 싸움을 벌이는 관광객들을 지나쳐 다섯 명은 분수대 뒤로 돌아갔다. 단체 사진이나 찍자는 공룡의 말에 수현이 카메라를 꺼내 지나가는 사람에게 몇 장만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옆에서 기다리던 라더는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익숙한 뒷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갔다. 덕개? 분명히 그 뒤통수는 덕개가 맞았다. 3년 동안 보지 않았던 사람이라 자신의 기억과는 달리 많이 변했을 수도 있겠지만, 사람에게는 직감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사람들 틈으로 빠르게 들어가는 연갈색의 머리를 따라 라더도 한 걸음씩 나아갔다. 어깨를 잡고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 수현이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라더야, 빨리 와!

"사진 얼른 찍고 가자!"

수현을 향해 알겠다고 말한 라더는, 조금 전 자신이 본 덕개가 생각나 뒤를 다시 돌아봤다. 아까 봤던 뒷모습은 사라지고 북적이는 인파 속에는 익숙한 사람이라고는 라더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잘못 본 거였나, 라는 생각이 든 라더는 괜히 신발코로 땅을 툭툭 치며 분수대로 돌아갔다.




광장에서 시간을 더 보낸 다섯 명은 저녁을 먹기 전에 호수나 보러 가기로 했다. 차를 타고 이동하던 와중에도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몇 년 전에 봤던 익숙한 호수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 밖을 계속 바라본 수현은, 덕개를 보고 싶다며 자신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겨울에 찾아간 호수라 그곳은 여전히 쌀쌀했다. 다행히 광장에서 봤던 만큼의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은 사람이 별로 없는 난간에 자리 잡아 경치를 구경했다. 3년 전과 다를 게 없는 주변의 풍경에 괜히 이 모든 게 그리웠다는 기분이 들었다. 따뜻한 거라도 마시자는 공룡의 말에 다섯은 좋다며 가위바위보를 했고, 첫판 만에 진 공룡이 사오는 거로 정해졌다. 너네 다 같이 짠거 아니야? 어떻게 나 빼고 다 가위를 낼 수가 있어. 공룡은 지갑을 꺼내며 궁시렁거렸다. 그에 라더가 웃으면서 크게 소리쳤다. 그러게 누가 제안하래?

"짠 거 아니니까 어서 코코아나 다섯 개 사오세요~"

"수현이랑 잠뜰이는 라떼요~"

아, 박잠뜰 3인칭 쓰지 마. 공룡은 징그럽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뒤로 물러났다, 뒤에 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생각보다 세게 부딪혔는지 공룡은 억 소리와 함께 손에 들린 지갑을 떨어트리며 뒤로 넘어졌다. 아직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네 명은 내일 예정된 비행기의 시간에 대해서 서로 얘기하기 바빴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두 손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내고 있던 공룡을 향해 누군가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못 봐서 죄송해요."

사과의 말과 함께 공룡은 시선을 내려 두리번거리면서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지갑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공룡의 시야에 익숙한 검은색의 지갑을 들고 있는 손이 들어왔다. 아, 또 감사하네요. 감사하다며 지갑을 받으려던 공룡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얼굴로 향했다.

"제가 뭐라도 사드릴… 어, 덕개?"

덕개라는 공룡의 말에 저들끼리 얘기를 나누고 있던 네 사람이 뒤를 돌아봤다. 그들의 눈에는 바람에 날려 흔들리는 연갈색의 머리와 같이 바람에 날리는 코트를 입은 채 목도리를 돌돌 두른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추위 때문에 두 귀와 코는 빨개져 있었지만, 3년 전 봤던 덕개의 마지막 모습과 다를 게 없는 똑같은 사람이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아직도 지갑을 든 채 내밀고 있는 오른손이 민망해졌는지 그는 왼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꺼냈다. 지갑, 안 받아가?

"누가 보면 나 가지라고 떨어뜨린 건 줄 알겠네."

내가 말했잖아, 우리의 인연은 마침표로 끝나지 않는다고. 덕개가 말하며 공룡의 손에 지갑을 쥐여주었다.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공룡에게서 당황한 채 서 있는 네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린 덕개는, 해맑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하나의 쉼표만 찍힌 채, 더 먼 미래의 만남을 위해 잠시 멈춘 것뿐이니까."

여섯 명이 3년 만에 호수 앞에서 다시 만난, 그날도 2월 7일이었다.

Written by. 제이
Drawn by. 베루